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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5일 금요일

도로명 주소에 대해

며칠 전 페북에 썼던 것인데, 기록을 위해 여기에도 남겨 놓기로 함)

도로명 주소는 사람들의 삶의 기반을 원칙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빠르고 효과적인 이동이라는 근대적 목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도로명 주소 홍보에서 가장 많이 설명한 것은 '찾아가기 쉽다'는 것이다. 찾아가기 쉽도록 왼쪽, 오른쪽의 번지를 따로 부여하고 방향에 대한 기준을 설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딘가를 찾아가는 것보다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머무르는 상황에서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경우가 더 빈번하다. 찾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춘 도로명 주소는 삶의 터전인 마을이나 동네와 관련이 없다. 그런 점에서 이것의 한계는 명확하다. 우리에게 住所는 말 그대로 사는 곳이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찾아오는 데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체국 직원분들이나 택배사 직원들의 관점에서는 다른 이야기도 가능할지 모른다. 여기에 쓴 이야기는 순수하게 거주자의 관점에서만 본 것이다)

2014년 7월 17일 목요일

낯선 도시에서 걷기

도시는 많은 사람들, 많은 일들, 오래된 시간 등이 써 내려간 텍스트이다. 도시가 텍스트라는 점에서 도시는 읽기의 대상이 된다. 도시를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나의 경우 도시를 읽는 한 가지 방법은 그 도시에서 많이 걷는 것이다. 처음 가보는 도시의 경우 가능한 한 많이 걷는다. 아주 오래 전 중국 난징(南京)에 갔을 때 첫날 버스를 잘못 내려 무거운 짐을 맨 채 3시간 이상을 걸었던 적이 있다. 분명 실수였고 엄청나게 힘들었지만 그 덕에 난징의 지리는 어느 정도 익혔다. 다음날부터 시내를 다닐 때 머리 속에 지도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타이베이 시립도서관 가는 길
내가 걷기를 선호하는 것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걷기에 익숙해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차가 없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는 방법을 먼저 알아보고 움직이게 되는데 그 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애매한 경우, 대중교통을 이용하나 그냥 걸어가나 시간이 10분 정도 차이 밖에 안 날 것 같으면 그냥 걷는다. 타이베이에서 수훠기념종이박물관(樹火紀念紙博物館)을 갈 때 그랬다. 숙소에서 그곳까지 지도를 보니 10분 정도 걸어가서 지하철 한 정거장을 가서 또 10분 이상 걸어야 하거나, 지하철 한 정거장 가서 환승한 후 다시 한 정거장 가서 또 다시 10분 이상 걷는 길이었다. 에이, 이렇게 귀찮게 갈아타고 계단 오르락내리락 하느니 차라리 걷자. 이런 결심을 하게 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이유는 차를 갖고 있지 않으니 직선거리로 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걷기이기 때문이다.

걷는 것은 이 곳의 상황들과 도시의 일련의 흐름들에 대해 감을 잡는 시간이다. 멀리 가기는 어렵지만 주변을 걷다가 먹을 것도 사서 먹고 카페에도 들어가 차를 한 잔 하면서 퍽퍽한 다리를 쉬어가다보면 어설프기는 해도 그곳 사람들의 삶의 자락에 슬그머니 포함되는 기분을 간혹 느끼게 된다. 그것이 그저 기분일 뿐일지라도.

물론 한 번에 다 읽어낼 수는 없겠지만 걷기는 최소한 그 도시의 결을 느끼는 시도로서는 중요한 성과를 가져다 준다. (단체 관광 혹은 패키지 여행의 경우 걸을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관광상품의 목적은 경관을 구경하는 데에 있지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는 데에 있지 않다. 특정 포인트를 향한 이동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었는가,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경관 포인트'와 쇼핑센터를 들렀는가만이 단체 관광 상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걷기의 과정이 생략되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의 삶에 포함되는 기분’이란 느끼지 못한다. 그곳 사람들 역시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동차나 버스, 오토바이 등의 탈것이 가기 위한 것이라면 걷기는 서기 위한 것이다. 서기 위한 걷기란 '무엇인가와의 만나기'의 다른 표현이다. 여행안내서에서 소개한 곳을 가기 위한 목적지향의 움직임이 아니라, 의도치 않았던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을 하게 되기도 하며 어떨 때는 그저 머리를 식히기 위한 목적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바오짱옌 국제예술촌 입구

웨이룬 국수집
(위 사진은 최근 관심이 생긴 주제 때문에 국제예술촌이라 불리는 바오창옌(寶藏巖)에 갔다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국수집이다. 들어갈 때는 그저 배가 고파서 들어갔을 뿐인데 상당히 맛있었다. 직접 손으로 뽑은 면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나와서 간판을 보니, 역사가 꽤 된 집이었다.)

이런 경우처럼 그저 걷다가 배가 고파 들어간 음식점이 예상외로 맛있고 여행안내서에 소개되어 있지 않았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아주 호평을 받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 익숙하지 않은 도시에 왔을 때 맥도날드나 KFC는 피하려고 한다. 그런 곳은 한국에서도 쉽게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걷다가 배는 너무 고픈데 적당한 식당을 만나지 못한다면 맥도날드가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수도 있다. 현지화된 맥도날드를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이때뿐이니 말이다.




타이베이의 유명한 음식 중 하나는 소고기 탕면(牛肉麵)이다. 이곳은 타이베이 안내서에 나와 있는 곳이어서 꼭 가리라 마음먹고 간 곳이다. 정말 맛있다. 국물을 한 숟가락 먹는 순간, 혼자 감탄했다.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융캉제(永康街)의 융캉 소고기 탕면과는 비교가 안되는 맛이었다. 매년 있는 소고기 탕면 대회에서 상을 많이 받았다는데 나는 2007년에 상을 받은 두당이몐(獨當一麵)을 먹었다. 배부르게 먹고 나와 옆집에서 푸젠의 후추빵 파는 곳을 발견. 하나를 사먹고 소화를 시킬겸(한국에 돌아올 날이 며칠 안 남았던 터라 빨리 소화를 시키고 과일음료를 사먹을 작정이었다) 지하철 역의 반대방향으로 걷다가 서점 거리의 두 군데 작은 서점에서 필요한 책을 각각 한 권씩 찾아낸 것도 중요한 수확이었다.

땀흘리며 후추빵 만드는 청년들

물론 걷다가 비를 만날 수도 있다. 습도는 엄청나게 높고 온도는 35-36도 정도 되는 여름날의 타이베이에서는 흔하게 경험하는 일이다. 한 두 시간의 소나기가 더위를 잠시 식히니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든다. (덥고 습한 사우나 기후에 익숙해서인지 타이베이의 친구들은 베이징과 같은 '건조한 여름'이 오히려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피부가 너무 건조해진단다.) 비를 만나면, 근처 카페에서 쉬어갈 명분이 생긴다. 에어콘으로 시원하게 '히야시'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본 것들을 기록할 시간도 벌게 된다.



여름의 타이베이는, 솔직히 걷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 아침에 나갈 때 '현재기온 35도'라는 안내를 보는 순간, 출발하기 전 호텔 로비에 서있어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든다. 그곳의 기온은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을 갖는다. 하지만, 2-3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가는 동안 그늘을 찾아 걷고 문이 열린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막강한 에어컨 냉기에 잠시 잠깐 기뻐하면서 가다보면 지하철로 빠르게 이동했을 때 당연히 보지 못했을 여러 가지를 보게 되고 알게 되고 느끼게 된다.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특정 목적에 종속된 이동이 아닌,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 기꺼이 설 수 있는 걷기란 도시를 읽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2014년 6월 29일 일요일

좀비와 귀신과 인간, 그들의 시간

얼마 전에 "좀비는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과거가 삭제된 존재'"라고 쓴 적이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좀비로 변화한 존재와의 조우는 그의 과거를 생각해 볼 여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좀비와 달리 그들의 과거 때문에 두려운 존재들이 있다. 귀신 혹은 유령이 그들이다. 좀비와, 귀신 혹은 유령의 대비는 어느 정도 명확하다. 좀비가 텅빈 육체의 존재들이라면 귀신 혹은 유령은 육체를 결여한 상태에 가깝다(육체를 결여하고 있으나 인간에게 시각적으로 보이기 위해 육체를 '임시로' 갖는 경우들이 많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좀비는 과거가 삭제된 존재라면 귀신/유령은 과거를 떠나지 못해 현재에 남은 존재들이다. 

귀신이든 유령이든, 혹은 그들이 깃든 집이든 과거의 사건이 중요하다. 그 과거는 오노 후유미가 [잔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고 몇 년 전 혹은 며칠 전의 '사건'일 수도 있다. 

귀신에게는 과거의 사건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그들은 과거가 현재까지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좀비를 과거가 삭제된 존재라 한다면 귀신은 현재가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좀비와 귀신에 대한 '대응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좀비에게는 현재적 처치(대개는 머리통을 박살내는 방식이겠지만)가 적합한 반면 귀신에게는 과거에 대한 해결만이 거의 유일한 치유가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론적으로 귀신의 문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힘으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이 더 안타까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일 수도 있다. 최소한 나에게는.

현재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 비단 귀신이나 유령에게만 필요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과거에 묶여 있는 귀신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더 간절히 필요하기에 인간은 공포문학과 영화를 통해 이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귀신과 유령은 그래서, 인간에 대한 강력한 은유이다.

(추기: 귀신들린 좀비가 있다면 정말 막강하겠는걸?) 

2014년 6월 21일 토요일

좀비: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도시는 악이 상존한다."

사실 이 말이 정확하게 맞는 말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악'이라 생각하는 행동에 대해 그것의 행위자는 그것을 악이라 정의하는 것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그 자신에게 도시는 악이 상존하는 곳이 아니다. 여러 낯선 사람들이 섞여 사는 곳일 뿐이고 자신은 자신의 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행위를 반복하고 또 다시 기획한다.

그 행위자는 나의 옆집에 살고 있거나, 오늘 아침 출근길에 마주쳤거나, 내일 가는 식당의 옆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다. 공포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더 크게 느끼는 감정적 반응이고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더 크게 느끼는 감정이라 할 때, 사회가 악으로 정의한 행위를 반복하는 자는 그 행위를 가할 상대에 대해 알고 있는 반면 그 행위의 대상인/대상이 될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공포란 후자의 몫이다.

기괴한 연쇄살인자는 자신만의 '좀비'를 만들어내려 하고 그 행위들은 중산층의 평온한 가족적 외형 속에 가려진다. 미국 중산층 가족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얇은 껍데기 속에 가려져 있는지, 그 속에 숨겨진 잔혹함의 상상력이란 어떤 모습인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문제는, 그 껍데기가 얄팍하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이라 정의되는 행위를 실제로 가려주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이 책이 주는 무서움은 주인공 Q__ P__의 행위보다, '평범한 가족의 외피'에 둘러싸여 그것이 감추어진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