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30일 금요일

설국열차

자리에 앉아 안전장치를 내려 몸에 밀착시키고도 여러 차례 흔들어본다. 그래도 불안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어렵다.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금속들의 소리와 함께 출발한 롤러코스터에 앉아 몸이 서서히 뒤로 기울어지며 올라가는 그 순간은 두려움과 공포의 순간이다.

공포는 불확실함, 미지의 상태가 만들어낸다. 앞에 어떤 경로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등 뒤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불확실할 때, 침대 아래에 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차마 볼 수 없는 상태, 문 뒤에 무엇/누구인지가 없다고 확신할 수 없을 때,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와 마주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공포'라는 단어이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그 무엇과의 조우가 현재의 추구가 만들어내는 고통과 공포를 상쇄할 수준일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는 길은 공포를 이겨내고 미지에 맞설 용기를 필요로 한다.  

커티스가 그 용기를 가진 인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는 꼬리칸을, 보다 정확하게는 그곳에서 있었던 자신의 젊은 날에 대한 기억과, 자신 스스로가 (어떤 맛을 알아버린) 두려운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앞으로 향한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그랬고 많은 영웅물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두의 운명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이 정말 자신인지 혼란스러워하던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로 그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의 운명'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 때문이었다. (윌포드를 만나기 전 그가 남궁에게 자신의 긴 이야기를 하는 시퀀스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회상씬으로 보여줘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던데, 개인적으로는 문앞에서 과거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기억/과거를 극화시키지 않고 누군가에게 토로하는 모습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 적절했다고 본다.) 엔진룸(엔진은 그것 자체로 질서와 제어의 구체적 사물이면서 동시에 은유이다)에 혼자 서 있던 그 순간은 윌포드(그에게 테크놀로지는 인간 구원의 수단이다. 실패한,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수단이기는 하지만)의 말처럼, 실제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자신의 상황, 꼬리칸부터 엔진까지 달려오는 동안 마주했던 많은 죽음들이 어쩌면 앞과 뒤(사실 이것은 위와 아래의 기만적인 수평적 전환이다)의 공모였을 뿐이고 자신은 그저 군중 속 일원이었을 뿐임을 억울하게 인정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그제서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미래의 공모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그는 결과적으로 '모두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시스템 전체의 부품처럼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희화된 방식으로 보여줬다면 <설국열차>는 그 현실이 어쩔 수 없는 질서이고 그렇기 때문에 타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고통임을 보여준다. 

영화는 엔진의 기본 속성인 질서와 제어, 질서와 균형이라는 명목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삶의 목적이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생양을 내세우는 정당화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모순적 상태를 기만적 수평상태의 위계화된 수직사회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꼬리칸에서 엔진에 이르는 그 수평선/수직선의 이동은 곧 위계의 시간성을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꼬리칸에는 창이 없기 때문에 시간을 스스로 인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시간마저 이 영화에서는 한정된 재화이다.) 

요나는 기차를 빠져나왔지만 영화를 본 우리들은 여전히 기차에 올라 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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