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4일 토요일

꿈의 진화?

어릴 때는 분명, 아주 허황된 것이라 하더라도 꿈이 있었다. 어른들이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라고 물으면 별 망설임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대통령이거나 과학자이거나 우주비행사이거나 뭔가 그 당시에는 그저 높아 보이는무엇을 아무렇게나 이야기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 단어 그대로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이룰 수는 없지만, 아니 오히려 이룰 수 없기에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꿈이었다. 그러다가 중학생 정도 되면 조금은 구체적인 모습이 된다. 화가라거나 작가라거나(이 시기 정도되면 대통령은 제외된다. 힘든 직업이라는 것을 이미 깨닫게 되는 거지), 선생이라거나, 아니면 비디오가게 주인과 같이 나름의 독특한 자기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 직종으로서의 희망이 등장한다

©Simon Hua, from flickr.com

고등학생 시절.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이 때의 꿈은 오로지 대학이 된다. 대학에 들어가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꾸는 꿈은 대학입학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 나보다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더 간절히 원하고 희망하고 그곳에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채근하는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어릴 때의 다른 꿈들을 대체한다. 그때까지만 참고, 다른 생각은 모두 유예시킨 채 지내야 한다고 믿는다.

그 꿈을 이루어 대학생이 되고 몇 년이 지나면 다른 꿈을 갖게 된다. 새롭게 등장한 꿈은 그저 직장인이 되는 것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사람 많은 지하철을 타고 부대끼며 출근하고 팍삭 익어버린 파김치 모양으로 퇴근하더라도 정식으로 월급을 받고 4대보험이 해결되는 직장인이 되는 것, 그것이 소망이 된다. 그것도 간절한 소망이.  

언제부터 꿈이 이런 식으로 진화했을까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4대보험이 해결되는 정규직으로 살게 되고 학교라는 현실에서 만나는 대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의 꿈의 진화 과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진보와 발전의 과정이 아니라는 사실도, 아프지만 느끼게 되었다. (진화라는 용어는 애당초 진보와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Llima, from flickr.com

이는 결국 사회의 문제이고 사회가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쉽게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사회의 문제임은 분명하지만 (최소한 현재는) 그 문제에 대해 사회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도 하고, 더욱이 그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도 쉽게 입을 열기 힘들다. 그렇다고 너희들이 지금보다 어릴 때 가졌던 꿈을 생각해봐. 그리고 그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칠 수도 없다. 그럴 수 없는 노릇이잖아. 물리적 시간을 돌릴 수도 없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당사자들도.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시간도 많이 필요할 것이다.
현실이 만들어내는 모순을 까발리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거야, 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비상구는 없어라고도 쓰고 싶지는 않다. 다만 비상구의 방향이 '순응'을 향해 나있는 것은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db photographs, from flickr.com


([위풍당당 개청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이십대 전반전] 등을 읽다가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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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1. 이 이야기를 직장인이 된 후, 그리고 그 이후의 꿈과도 연결시켜보라는 지인의 코멘트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혹시 기회가 된다면. 그런 글을 쓰겠다는 꿈을 그때에도 기억한다면 연결시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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