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중국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중국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4년 3월 2일 일요일

스모그에 덮인 베이징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이나 출장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움직일 때가 있다. 익숙한 지역을 갈 때에도 조금은 설레고 떨리지만 익숙하지 않은 지역을 갈 때 설레고 떨리는 마음이 더 커지는 것은 누구나 갖는 동일한 경험일 것이다. 익숙한 곳이든 그렇지 않은 곳이든 비행기로 갈 때 내가 가장 설레고 떨리는 순간은 착륙을 위해 안전벨트 사인이 켜지고 “모든 의자 등받이와 좌석 테이블을 원래의 위치로 해주시고 창문 가리개는 모두 열어 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며 서서히 하강을 시작할 때이다. ‘이제 곧 새로운 지역과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겠구나’라는, 약간은 낭만적인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짐을 무사히 찾고 현지의 교통수단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적당한 시간에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일과를 시작해야 한다는 등의 잡다한 생각들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는 것도 이 순간이다.

지금까지 다녀본 곳이 몇 곳 되지는 않지만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고 활주로를 향해 다가갈 때 비행기 창밖으로 봤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본 것은 중국 후베이 이창에 갈 때였다. 내가 가기 전날까지 큰 비가 며칠 동안 내렸고 실제로는 그 예보 때문에 약간의 긴장을 하고 있었다. (우려와 달리 이창에 갈 때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이창에서 상하이로 돌아올 때 거의 6시간 이상 이창 공항에서 기다려야 했었다.) 내가 도착할 그 즈음 비가 그치고 하늘의 구름이 확연하게 걷히면서 손오공이나 신령님이 탈만한 크기의 작은 구름들이 촉촉한 산과 들 위에 낮게 얹혀 있었다. 비가 개인 날의 촉촉하면서도 쾌청한 기분은 비행기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2009년 이창 강변. 비가 그친 뒤의 석양. (원본파일을 못찾아 예전에 미니홈피에 올렸던 사진을....)

이와 정반대의 기분을 느낀 것은 2014년 2월 베이징에 갈 때였다. 보통 비행기는 구름보다 높이 떠서 운항을 하다가 착륙하는 시점이면 구름을 뚫고 내려와 어느 정도 지나면 땅위의 건물과 강과 도로가 조금씩 보이고 그것이 점점 커져 실물크기가 될 만하면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는 덜컹거림과 함께 착륙의 안도감을 갖게 된다. 타이베이 시내 숭산 공항에 내릴 때에는 타이베이의 유일한 높은 건물인 101빌딩을 한참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번의 베이징은 무척 다른 경험이었다. 분명 착륙을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을 들었고 눈이 부셔 내려놓았던 창문가리개를 올리고 얼마 되지 않아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는 다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을 내려와도 비행기는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비행기가 공항 근처 가로수 바로 위에 있는 정도의 높이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나무와 건물과 풀들과 땅이 보였다. 하늘 높이 떠있는 구름이 아니라 공연 때 무대에 깔리는 드라이아이스가 아주 아주 두껍게 땅을 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뉴스에서만 듣던 스모그가 이 정도라니. 5년만에 다시 온 베이징에 대한 설레임 따위는 전혀 없이 ‘이런 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며칠이기는 하지만 과연 괜찮을까?’ 따위의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짐을 찾아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는 동안 본 것은 스모그뿐이었다. 1952년 4000명 정도가 사망하고 10만 명이 폐질환을 갖게 되었다는 런던의 스모그 관련 자료들을 한 순간에 완전히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한 낮의 태양은 스모그로 뿌옇게 가려져 있어 맨눈으로 직접 봐도 눈이 전혀 아프지 않았고 독특한 모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건물은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옛 베이징의 사합원건물에 사용하던 회색 벽돌과 같은 색을 띄고 있었다.
  
한 낮의 태양이 이렇게 보입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CCTV 건물
베이징에 자주 와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스모그 때문에 도시 전체가 활기를 잃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마스크에 가려져 있어 읽기 어렵고 하루 종일 희뿌옇던 도시는 저녁이 제 시간보다 더 일찍 찾아오는 것 같았다.

매일 매일의 뉴스와 기상예보는 스모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은 스모그에 대한 대처, 회피, 조롱과, 긴 시간 동안의 대면으로 인한 무관심으로 채워진다. 마라톤 동호인들은 방독면을 쓰고 훈련을 하고 허베이의 한 주민은 스모그 발생과 대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정부를 고소하였다고 한다. 베이징 대학 곳곳에 세워져 있는 동상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이와 관련된 사진은 여기를 클릭해서 보세요).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동상들도 스모그는 참기 어려웠나보다.

베이징 왕푸징 백화점 앞. 설립자 동상에 마스크를 씌워 놓았다. 

스모그가 이처럼 지독하게 오래 가고 이리도 멀리 가는 데에는 베이징의 급속한 확장(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베이징이 이제는 거의 허베이까지 확장되었다고 한다. 지하철 노선들이 남과 북으로 끝도 없이 연장되는 것이 그 증거이다.), 개발과 성장 우선 정책이 중요한 원인이겠지만 이와 함께 건조한 날씨도 한 몫 한다. 기본적으로 건조한 곳인데 최근에는 그 건조함이 극에 달한 모양이다. 작년 가을부터 비는 거의 안 왔고 이번 겨울에 눈도 단 한 차례 내린 것이 고작이라고 한다. 비가 안 오니 올해 농사도 걱정이지만 대기 중의 부유물질들이 가라앉지를 않는 것이다. 물론 공기 오염이 원인이어서 더 건조해진 것인지, 건조해서 공기오염이 더해진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스모그는 현단계의 대기오염으로만 한정될 문제는 아니다. 스모그에 장기간 노출될 경우 건강에 안 좋다는 보고가 이미 중국에서도 뉴스를 통해 소개되고 있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한 마스크들에 대한 성능 비교가 뉴스에 간혹 보도된다. 학생들은 체육시간에 밖에서 운동을 하지 못하고 아이들도 밖에서 뛰어놀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이 밖에 나오기를 꺼려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체육시간에 밖에서 운동하던 학생이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아침마다 공원이나 동네의 적당한 넓은 곳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태극권 모임, 사교댄스 모임 등이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앞으로 암발병률도 높아질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전망들도 나온다. 밖에 나가 뛰어놀지 못했던 아이들이 자랐을 때 필요한 사회적 비용은 과연 얼마나 될까? 스모그가 걱정스러운 또 다른 이유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숨막혔던 것은 따로 있다. 실제로 베이징 거리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마스크를 쓰는 경우라면 방진마스크, 세련된 패션 마스크 등이 눈에 띄지만 실제로는 마스크의 답답함과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스모그가 심하지 않을 때면 하루걸러 하루 정도는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베이징에 있던 일주일은 스모그 황색경보와 주황색경보가 반복되었던 시간이었다. 하필이면.
어쨌거나 사람들은 외부의 시각과 판단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담담했다. 이미 몇 년 동안 지속된 일이어서 무심해졌을 수도 있다.

스모그보다 더 불편하고 답답했던 것은 여전히 안정적이라고 느끼기 어려운 일상생활의 시스템과 국가의 시선이었다. 내가 중국에서 불편해하는 것 중 하나는 길을 건너는 일이다.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가 들어와도 안심하고 건너기 어렵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좌우를 여러 차례 확인하며 건너야 하는 건 차든, 자전거든, 전기자전거든 무엇이 어느 방향에서 횡단보도를 향해 들어올지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내리는 문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사람을 아주 가끔 보기도 하고,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민공들의 큰 짐과 가방은 지하철의 통로를 꽉 메우고 있다.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민공이라는 존재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기억하기로 하자.) 지하철과 버스, 카페에서 이어폰 없이 게임을 하거나 영화/드라마를 보는 경우도 있다. 식당을 채우는 담배연기는 무척 참기 어렵다. 정말 많이 개선된 것이기는 하지만 도심에서도 일부 화장실은 무척 불편하고 더럽다. 제한속도 80킬로미터인 도로에서 120킬로미터로 달리며 지키라는 속도를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다. 단속 카메라도 몇 곳 없나보다. 운전을 안 해 잘은 모르겠지만 겁이 많은 나는 뒷자리에서도 안전벨트를 꼭 맬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역시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니 중국사람들만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제대로 지내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 일들은 또 있다. 국가대극원에 갔을 때 내부를 구경하기 위한 입장권을 사려 할 때 세 명의 암표상이 다가왔다. 표를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매표원들과 곳곳의 경비들은 그들을 분명 보고 있었는데 어떠한 제지나 만류도 없었다. 매표소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면 모를까, 매표소 바로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팔다니. 매표소에서 30위안에 파는 입장권을 그들은 10위안에 팔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더 싸게 해주겠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싸게 해주는 것일까? 베이징의 한 테마파크에서 열리는 공연을 볼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액면가는 280위안이 찍혀있는 표를 65위안에 살 수 있었다. 가짜표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발매된 표인데도 말이다.

나야 짧은 시간 동안 있었으니 잘 모르겠지만 장기간 생활한다면 이런 것은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적응한다면 오히려 경제적으로 덜 손해를 보며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안전을 위한 것이라 이름 붙은 검사와 검문은 쉽게 익숙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가방과 손에 든 모든 것은 X-Ray 투시기를 통과시켜야 한다. 직원들 모두가 위험한 물건이나 폭발물을 열심히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을 때도 있었다. 잡담을 하기도 하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공항에 들어올 때 체온 측정기 앞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직원은 모두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었다. 검문/검사는 천안문에 가까이 갈수록 더 자주 있고 상대적으로 더 철저해진다. 만약 검문 정도의 그래프를 그린다면 베이징의 중심에 가까이 갈수록 기울기가 더 커지는 그래프가 될 것이다. 천안문 광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안전검사(라는 이름의 검문)를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곳곳에는 사복을 입었으나 누가 봐도 경찰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 사람들과 제복을 갖춰 입은 무장경찰들이 서 있다.

스모그 때문에 뿌연 천안문 광장
한국도 간혹 검문 검색이 있고 중국보다 훨씬 심한 정도의 검문과 감시가 일상화되어 있는 곳도 분명 있으니 중국의 사례만을 지나치게 타자화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지금처럼 ‘테러’와 타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증대한 위험 사회에서 검문과 검색을 완전히 포기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중국에서 지하철을 탈 때마다, 무엇인가 큰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경험하는 검문과 검색은, 과장한다면 나의 모든 것을 국가 자신의 손 안에 놓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심지어 상하이 박물관에 들어갈 때에 생수병은 열어서 물을 마셔보라고 한다. 휘발유나 인화성 물질 반입을 막기 위해서란다. 광장이라는 곳은 사람이 모여 생활이 되는 곳이다. 구경꾼도 모이고 장사꾼도 모이고 관광객도 모이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모이고, 소매치기도 들를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검문과 검색이 있음으로 해서 천안문 광장은 특정 사람만 모일 수 있는 곳이 된다. 모이기는 하지만 모여서는 안 되는 곳. 1989년의 민주화 요구와, 90년대부터 몇 차례 있었던 법륜공 모임에 크게 데어서일까. 천안문 광장에서의 검문은 인민의 안전이 아니라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변화는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유튜브 등 근본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사이트들에 접속하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 일부 중국 친구들은 VPN을 사용하거나 다른 우회경로를 이용한다. 한국의 통신사를 로밍해 간 전화기에 내가 테더링으로 접속했을 때 나 역시 페이스북에 접속이 가능했었다. 실험삼아 글을 올리려 했을 때 ‘게시’ 버튼이 활성화되지 않아 실패하기는 했지만. 기술적으로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일부 호텔에서는 투숙객들을 위해 중국 정부가 금지한 사이트의 접속을 가능하게 한다고도 하니 1984의 빅브러더처럼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국가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감추거나 잠시 숨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내가 일주일 동안 베이징에서 ‘상대적으로 좀 더 강하게 느끼는 숨막힘’이라는 것이 짧은 기간 동안의 경험일 뿐이어서 확증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스모그를 이겨내기 위해 들이는 많은 노력들의 일부가 이곳 시스템의 사소한 변화들을 만들기 위해 투입될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사람들이, 혹은 어떤 사람들이 “너나 잘 해”라고 하면 할 말은 없겠지만.

(추가: 2014년 3월 1일 쿤밍의 기차역에서 '괴한'들의 칼부림으로 29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다쳤다는 뉴스가 나왔다. (관련 뉴스는 이곳에서 보세요.)  분리 독립을 지지하는 신장 위구르족의 '테러'라는 발표가 나왔고 양회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긴장감은 더욱 커졌다고 한다. 내가 잠깐 경험했던 것보다 더욱 '팍팍한' 검문이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2013년 7월 타이완 타이베이(台北)와 타이중(台中)

타이베이와 타이중에 다녀온 것이 벌써 한참 되었다. 모든 것을 다 기록해 놓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버려서.... 사진들 위주로 간단하게만 정리해 놓기로. 


숙소의 비품들. 이런 아기자기함이 타이완의 즐거움 중 하나. 


타이베이 시먼딩(西門町) 부근 숙소 근처에 있던 카메라 거리. 


7월의 타이베이는 무척 덥다. 습도도 높고. 
하지만 걷다보면 무척 정감있는 거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발견한 곳. 국립대만대학(国立台湾大学) 옆의 골목. 

즈텅루(紫藤盧)라는 이름처럼 마당에는 멋진 등나무가 있는, 약 100년 정도 된 찻집. <음식남녀>에도 등장한 집이라는데 그렇게 여러 번 본 영화에서 이 곳을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한 듯. 차값이 약간 비싸기는 하지만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는 여유 한 번 부려본다면 타이베이에서 거의 최고의 선택일 듯. 



아래 사진은 즈텅루 입국에 붙어 있던, 미국소 반대 스티커. (사진을 찍는 나의 얼굴도 비쳐 보이는데 거기에도 '금지' 표시가.......즈텅루는 나를 금지했던거야. ㅋㅋ)



원래의 계획대로 기차를 타고 타이중으로 이동. 타이베이에서 일반 기차로 약 2시간 반 정도 남쪽으로 내려오면 있는 도시. 타이중은 타이베이, 가오슝에 이어 타이완의 세 번째 도시. 지하철은 없고 버스노선이 아주 빽빽하게 잘 짜여져 있음. 물론 배차간격이 짧은 것도 있고 긴 것도 있고. 타이중을 소개하는 어떤 책에는 타이베이에서 사용하는 이지카드(Easy Card,悠游卡)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대부분의 버스에서 이지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타이중에 머물던 기간 동안 이지카드를 사용하지 못한 것은 단 한 번 뿐이었는데 그 버스는 루강에서 타이중으로 들어오는 시외버스였고 교통카드 자체를 쓸 수 없던 버스. 그 외에는 아무 문제없이 이지카드를 사용할 수 있고 타이베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세븐일레븐 등의 편의점에서 충전 가능. 

타이중에서 감탄했던 것은, 교통카드를 사용하면 시내에서 8km 이내 거리는 버스를 무료로 탈 수 있다는 것. 개인차량을 줄이고 대중교통을 활성화하려는 정책의 소산인 것 같은데 버스를 타는 입장에서는 아주 편리하다. 나중에 타이베이에 돌아와 MRT에서 사용내역 확인해보니 실제로 타이중에 있는 동안  28차례 정도 버스를 탔는데 그 중에서 좀 먼 곳을 갔던 세 번 정도만 요금이 빠져나갔고 나머지는 모두 0원!!! 버스카드만 있고 노선만 잘 확인하면 시내에서 움직이는 것은 거의 공짜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 

타이중에 있는 동안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꽤 익숙해졌다. 낮 동안 덥고 습하다가 저녁쯤 되면 거센 소나기가 내려 낮동안의 많은 습기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확실하게 보여준다.

타이중 도착 첫날, 비가 그친 후 보게 된 쌍무지개.



타이중에서 발견한 공차. 그런데 다른 과일차들 브랜드가 너무 많아 그곳의 공차를 마셔볼 기회는 없었다. 큰맘 먹고 전주나이차(珍珠奶茶, 버블티)를 마시러 간 날은 전주(펄)가 다 떨어졌다고 해서 포기. 개인적으로는 Mr.Wish의 복숭아차와 CoCo's의 자몽주스가 정말정말정말 좋았다. 가격은 한국돈으로 한 잔에 대략 1500원 정도. 



아래 사진은 파인애플주스(한화 약 1200원 정도). 리즈와 망고. 



타이완의 가장 대표적인 청핀서점(诚品书店). 타이베이와 타이중 (그리고 심지어 상하이까지) 곳곳에 있지만 타이중 중여우백화점(中友百货)에 있던 분점이 가장 쾌적하고 조용했다. 






5집 건너 하나씩 사원이 있다는 루강(鹿港). 이 이름은 베이징과 상하이 등의 유명한 대만식당 프랜차이즈 鹿港小镇을 통해 들어봤던 바로 그 이름(베이징이나 상하이에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사슴식당 혹은 벨라지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음). 실제의 루강이라는 곳은 매우 작은 도시이고 사원이 정말 많다. 타이베이에 있는 용산사보다 더 오래된 같은 이름의 절이 있는 곳. 아래 사진은 짝을 맺어준다는 월하노인을 모신 사원. 


루강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불상 및 각종 사원용 물품을 제작하는 목공소들. 





 타이중 외곽의 '무지개마을'(彩虹眷村).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곳에서 보시길(중국어).


무지개마을에 오는 사람들에게 마을 안내도 하고 노래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고/찍혀주는 아이언맨 청년.




그 유명한, 동해대학 안의 루스 채플.





중국 본토에는 마오 시대를 기억하려는 '붉은 식당'이 있다면, 대만에는 국민당 정권 초기(그리고 근대화 초기)를 기억하려는 식당이 있다. 식당 안은 초기 근대화 시기의 모습으로 꾸며놓았다. 두 번째 사진은 당시의 '공중도덕' 계몽 프로젝트의 흔적들.



식당의 2층은 근대화된 극장처럼 꾸며 놓았는데 그곳에 있는 <사망유희> 포스터. 




일상을 모두 정지시킨 태풍. 태풍으로 고속철과 철도는 거의 반나절 동안 모든 운행이 취소되었고 식당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타이중의 번화한 거리 중 하나인 차오우다오(草悟道)의 한 건물. 건물의 옆면에는 각종 식물들이..... 그리고 건물 안에는 역시 청핀서점이 있다. 주말이면 건물 앞 광장에서는 동물보호협회에서 나와 유기견들을 새 가족의 품으로 보내는 행사를 한다.


차오우다오는 다양한 예술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우유팩 모양의 전시물들과 예술제 안내판.






이곳에 있는 재미있는 카페. Robot Station. 온통 로봇 모형과 장난감들로 가득 찬 곳. 







차오우다오 근처에서 타이중 사람들이 많이 찾는 빙수집. 그저 수박, 멜론, 망고 등의 과일에 우유 얼음 올리고 연유 약간 뿌리고 달콤하게 졸인 검은찹쌀을 조금 올릴 뿐인데 정말 맛있다. 한 그릇에 한화 약 2800원 정도. 개인적으로는 타이베이의 三兄妹나 아이스몬스터, 스무디 등에 비해 훨씬 괜찮았던 곳. 강추!! (먹느라 바빠서 실제 빙수 사진은..... ㅎㅎ)


타이중에 있는, 케익과 펑리수, 태양빵 등으로 유명한 日出. 그곳의 여러 분점 중 하나인 宮原眼科. (이곳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른 블로그로 대신함. 역시 중국어) 안과는 아니고 1층은 아이스크림 테이크 아웃, 2층은 약간 비싸지만 식당. 이곳에서 먹은 아이스크림. 8가지 아이스크림이 포함되고 파인애플로 조각한 봉황(?)이 서 있다. 봉황(?)의 부리는 빨간 고추를 잘라 끼운 것이니 먹지말라고 아이스크림을 서빙하는 직원이 친절하게 말해줌. (최근 이곳은 다른 컨셉으로 공사를 했다는 소문이.....)





아래 사진이 이 포스팅의 마지막. 
맑은 날의 타이중. 왼쪽 아래에 보이는 곳이 유서깊은 타이중 기차역. 






2013년 6월 15일 토요일

홍은택의 책 <중국만리장정> (2013, 파주: 문학동네)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책인데도 빨리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나는 책이다.
그래서, 서둘러 기록으로 남기기.

홍은택의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그의 미국 자전거 횡단기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2006, 한겨레출판)이었다. 출판되고 몇 년 후에 읽은 것이었는데 그 때는 내가 자전거에 완전 꽂혀 있을 때였다. 당시에는 자전거를 탈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았었고 자전거가 재미있었으며 친척들 몇 명이 우연히도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홍은택의 책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여행기였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자전거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구입했던 자전거 관련 책들은 이런 여행기뿐 아니라 도심에서 로드바이크를 탈 때 지켜야 할 것들을 적은 안내서, 자전거의 메카닉에 대한 책들도 포함된다.)

나는 자전거에 초점을 맞춰서 그의 책을 읽었지만 그 책은 자전거보다는 여행의 길목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을 읽고 나서 나 역시 그가 따라 간 Trans American Trail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길을 혼자 가면 힘들테니 누군가를 꼬셔서 함께 가되 그가 운전하는 지원차량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렇게 뼈속까지 연도남이다.)

한참을 지나, 홍은택이 중국 자전거 여행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중국 자전거 여행에 대한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고 현대 중국 젊은이들이 워낙 많이 다녀서 웨이보나 중국 블로그, 각종 포털에서도 각종 여행기는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야기를 전달할 줄 아는 홍은택의 책이다. 게다가 심지어 중국이라니. 이번에는 자전거가 아니라 중국이기 때문에 손에 들게 되었다. 주문완료 확인버튼을 클릭하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그의 시선을 따라 중국을 여행하는 기분에 들떠 있었다.

이 책만 놓고 보면 홍은택을 한국의 피터 헤슬러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피터 헤슬러의 <리버타운: 양쯔강에서 보낸 2년> (2003, 눌와)과 <컨트리 드라이빙: 자동차로 달린 7000마일 중국여행기> (2012, 중앙북스), 그리고 한국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Oracle Bones 같은 책들은 인류학자가 쓰지 않은 가장 인류학적인 책에 포함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문화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중국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주한 경험들을 솔직하면서도 위트있게, 그러나 사람에 대한 존중도 놓치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피터 헤슬러의 책은 중국에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한 번 정도 읽어볼만한 저작이다. 홍은택의 이 책 역시 자전거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마주한 경험들을 솔직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꼭 중국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읽어보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재미는 일단 홍은택의 유머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상하이에서 교통법규가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가장 피해보는 사람도 보행자다. 그들에게 길의 권리는 없다. 도시라는 정글에서 사자나 호랑이는 화물차나 버스 같은 대형차들이다. 그리고 관리들이 많이 타는 아우디 검정 승용차, 그들은 경적의 데시벨로 권력을 표시한다. 유리창이라는 방음벽이 없이 차도로 다니는 자전거에는 바로 귀에 대해 경적을 울리는 것 같다. 상하이에서 경적은 꼭 필요할 때 울리는 장치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운전자들이 경적을 누르지 않을 때야말로 위험한 상황이다. 졸고 있거나 동승자와 수다를 떨다가 한눈을 팔아서 미처 경적을 누를 때를 놓친 경우이기 때문이다. (35-36)

본문도 본문이지만 각 장에 붙인 소제목들은 제목만으로도 즐겁다. (만약 이 상태를 문자로 표현한다면 ㅋㅋㅋㅋ 정도 될 것이다.)

3장 아무도 양보하지 않을 거라는 예측 가능성
5장 여행은 로(路)를 잃어도 도(道)를 얻는 과정
11장 프랜차이즈화되는 중국
39장 권력자는 당대를, 시인은 천 년을 사는구나
등등.

저자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중국이라는 과목을 학습하러 떠난 여행의 결과이다. 물론 그의 여행은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과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자전거가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떠날 것을 아직도 기대하고 있다. 그의 가족들은 반대할지도 모르겠지만.

학술적이지는 않더라도 사람의 눈으로, 사람의 속도로 중국을 바라보는 그 시선을 따라가는 동안 솔직한 중국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저자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팬이 되었다.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default 상태로의 회귀


상하이에서 핸드폰을 도난 당했다. 도난이다. 개통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았고 아직 첫 사용료도 청구되지 않은 새 전화기이다. 사람이 많아 움짝달싹 못하는 지하철에서 벌어진 일인 것 같다. 외투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잠가 놓았었는데 지하철에서 내려 무엇인가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지퍼가 열려 있고 그 안에 있던 핸드폰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지하철로 세 정거장을 움직이는 잠시 동안 일어난 일이다. 


by dullhunk, flickr.com 
최근 중국에서 핸드폰 분실은 흔한 일이 되었다특히 지금은 춘절을 앞둔 시기이기 때문에 소매치기가 더 많다고 한다훔쳐서 고향으로 가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런 사건의 '용의자'들은 모두 신장(新疆)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신장사람들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하미과 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여름에 주로 먹는 하미과가 주로 나오는 지역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왜 상하이의 소매치기는 모두 신장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일부 상하이 사람들은  신장 외에도 가난한 지역이 많지만 소매치기는 그들로 대표된다는 점에 대해서 인정했다. 한 친구는반은 농담이었지만다른 가난한 지역 사람들은 단결하지 못하는데 신장 사람들은 단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또한 그들은 다른 가난한 지역 사람들과 달리 외모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소매치기가 모두 신장 사람일리는 없다상하이 출신도 있을 것이고 다른 지역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신장이나 칭하이, 구이저우 등 가난한 지역 출신들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신장 사람들은 외모로 인해 한눈에 구별되는 '외지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외모에 의한 타자화를 통해 소매치기로 낙인 찍힌다외모에 의한 타자성이 행동과 사회적 존재감의 타자성으로 전환되는 사례가 바로 상하이의 신장 사람들이다.

어쨌거나 상하이를 다닌지 10년만에 처음이고 태어나서 처음 경험한 '소매치기'이다. 이 일 때문에 분실증명을 발급받기 위해 경찰서에도 다녀왔다.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쓴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다

10년 동안 상하이에 들인 정성과 관심이 부족했나보다. 내가 매번 상하이만을 이용해서 지금까지의 시간을 채워왔던 것이 못마땅했던 것일 수도 있다. 뭔가 가져가면서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으니 핸드폰이라도 가져감으로써 보상을 요구한 것일 수도 있다. 상하이의 한 친구는 내게 중국에서의 경험이 아직 충분치 않았던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신고를 담당한 경찰관은 나에게 분실 순간 음악을 듣고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음악을 듣고 있었다면 음악이 갑자기 멈추니 금세 알지 않았겠냐고 반문하니 이어폰 줄을 끊고 가져가는 경우도 흔한데 그렇더라도 이렇게 사람 많은 지역에서는 어어~” 하는 사이에 그 도둑은 사라지니 잡을 수 없다고,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 생각하라고 했다. 눈 멀쩡히 뜨고 있다가 핸드폰을 분실 혹은 소매치기 당한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인류학자가 현지에서 다양한 범죄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위협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죽음을 맞게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 상하이와 같은 복잡하고 현대화된 도시에서 인류학자로서의 정체성으로보다는 외국인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고 이번 일이 인류학자의 고생으로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지역에 대해 익숙한 사람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계속 아이폰을 쓰다가 안드로이드 폰으로 바꾼 것에 주변 사람들은 배신자라고 했지만 두 주 정도 사용하면서 즐거웠던 것은 그것을 나의 방식으로 '개성화 설정'(customizing)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customizing한 나의 핸드폰은 그것을 훔치는 동안 그 행위자가 아주 잠깐 동안 느꼈을 불안함과 뒤 이은 안도감 속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몇십 만 원의 수익으로 바뀐 후 (한글로 되어 있는 소프트웨어이니) 중국어 소프트웨어를 탑재한 후(이를 중국에서는 shuaji(刷机)라고 한다. 소프트웨어를 밀어버리고 새로 깐다는 뜻이다) 원래의 상태’(default)로 돌아가 낯선 땅 어디에선가 정규 상품보다 저렴한 가격에 새 주인을 만날 것이다. customized되어 있던 특별함, 독특함은 사라지고 평범하고 일반적인, 초기화 상태로 변해버리는 과정. 그것이 도난당한 폰이 맞이할 운명이다

그렇게 보니 이별은 모두 그 모양인 듯 하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누군가였던 사람이 이별의 과정을 통해 평범한, 무리 중의 하나로 변화하는 것. 특별하고 독특한 무엇을 잃어버린 채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무리 중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어서 이별은 슬픈 것이다

핸드폰도 그런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2012년 7월 17일 화요일

6일 동안의 장가계와 원가계 여행

7월이 시작되자마자 중국 장가계와 원가계를 패키지 여행 상품으로 다녀왔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패키지라는 것을 따라가 봤는데 이러저러한 장점과 단점이 있더라구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기회를 통해 기록하기로 하겠습니다.

장가계와 같은 곳은 교통이 불편할 것이라 패키지를 선택한 것인데 자유여행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중국 국내선을 타면 장가계 공항에 내릴 수 있고 기차역도 장가계 국립공원 바로 앞에 있습니다. 관광객을 위한 볼거리 위주의 관광이 아니라 트래킹을 목표로 한다면 패키지 상품 대신 개인여행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몇 장의 사진들과 간단한 설명만 남겨 놓기로 하겠습니다.
(사진은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첫날 묶었던, 창사(Changsha, 长沙)의 호텔 맞은편에 공사중인 아파트. 꽤 독특한 모습입니다. 




밤 비행기를 타고 국제선이 갈 수 있는 창사에 도착한 것이 밤 12시를 넘긴 시각이었습니다. 호텔에 도착하니 1시. 다음날 아침 7시 30분에 장가계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창사와 장가계는  약 300km 떨어져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버스로 4시간 정도를 이동하면 됩니다. 한국의 경우 고속도로 공사를 할 때 한두 차선은 남겨 놓고 교행을 하도록 하여 공사를 진행하는 반면 저희가 가야 하는 고속도로는 창사에서 장가계 방향을 완전히 막고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창사를 출발하여 어느 정도 구간은 국도를 이용했고 결과적으로 장가계를 갈 때는 6시간이 걸렸습니다. 

장가계는 험준한 바위산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첫날 간 곳은 해발 약 1800미터 정도. 놀랍게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갑니다. 


산의 모양새도 멋지지만 약 35분 정도 올라갈 수 있는 케이블카를 어떻게 만들었을까가 더 신기했습니다. 위 사진에서 케이블카 뒤쪽에 보이는 길도 가파른 절벽에 만들어 놓은 찻길입니다. 국립공원 내부의 셔틀버스들이 저 길에서 운행합니다. 어떤 책에서, 한국은 산을 올라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반면 중국은 모든 높은 산에 계단을 놓거나 케이블카 혹은 버스를 통해 정상에 올라가는 목적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앞서 트래킹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든 생각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더라도 장가계는 숲길을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과 경이를 줄 것 같은 곳입니다. 


산 위에 올라가면 절벽 옆에 만들어놓은 잔도(栈道)를 약 30분 걸어서 이동합니다. 위 사진 중간 쯤 희끗희끗 보이는 것이 그 잔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역시, 그것을 걷는다는 사실보다 어떻게 만들었을까가 더 신기한 곳입니다. 전국(战国) 시기 만들어진 잔도의 흔적은 예전에 장강에 갔을 때 본 적이 있기는 합니다. 장가계의 잔도는 관광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천문동이라 불리는 자연적인 바위굴입니다. 천문동까지 올라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계단과 폭이 좁고 가파른(40도 정도?) 계단이 번갈아 있습니다. 999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세어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 말을 믿어야지요. 실제로는 올라가다보면 힘들어서 제대로 세기 어렵더라구요. 올라가면 바람과, 저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물들 때문에 무척 시원합니다. 비오듯 흘린 땀에 대한 보상이라는 느낌이. (하지만 그건 한 순간의 느낌일 뿐. 이 길을 다시 내려오면 또 엄청난 땀을 흘릴 수밖에 없다는. 참고로 아열대에 가까운 기후지역인 장가계의 7월 초 날씨는 32-36도 정도입니다만 고도가 높아서 그 정도의 기온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가기 전 예의주시했던 일기예보에서는 매일 비 예보가 있었지만 제가 있는 나흘 동안은 약 10분 정도 내린 소나기를 제외하고는 날씨가 계속 좋았습니다.) 1999년 에어쇼를 하면서 저 천문동 사이로 네 대의 전투기가 통과하는 쇼를 보여줬다고 합니다. 


천문동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는 큰 향로가 있고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큰 향을 피웁니다. 이런 모습은 중국의 왠만한 관광지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밤에는 천문산의 한 쪽에서 거대한 공연을 합니다. 약 500명 정도가 출연하는 <천문호선(天门狐仙)>이라는 제목의 공연으로 <인생>(1993)을 만들었고 이후 <영웅> 혹은 <황후화> 따위의 영화를 만든 장이머우 감독이 기획한 것입니다. 항저우, 베이징, 그리고 다른 몇 지역에 이렇게 '대규모' '볼거리' 위주의 공연들이 많고 장이머우가 크게 관여한 것들이 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연구를 해 볼 예정입니다.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는 현재의 중국 관광지에서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공연이 썩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장가계와 근처 지역의 전설과 몇 이야기들을 조합한 것인데 볼거리에 치중하다 이야기를 놓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연을 보다가 지루할 때 찍은 사진 하나 올려 놓습니다. 달이 막 뜨려고 하는 천문산 모습입니다. 오른쪽 중간에 있는 노란색 조명은 앞서 본 천문동에 조명을 켜 놓은 것입니다. 



이틀째. 
보봉호(宝峰湖)라는 산정 호수 앞에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부채를 파는 모습입니다. 



한국돈도 받는데 1000원 혹은 2000원 짜리 물건이 대부분입니다. 밤, 부채, 오이 등 다양한 것들이 있는데 어떤 경우 장사하는 사람들이 '천 원, 천 원' 이렇게 외치지만 막상 살 때는 '천 원, 천 원' 이렇게 두 번 불렀으니 이천 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한 전략적 선택일 수 있습니다.  

토가족 박물관도 있습니다. 호북, 호남 등에 걸쳐 있는 소수민족들의 삶을 살짝 볼 수 있습니다. 전에 장강에서 봤던 토가족의 문화와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은 활을 이용해 솜을 트는 분의 모습입니다. 활을 이용하는 것은 한국과도 동일한 방식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원가계로 가면, 영화 <아바타>의 배경에 영감을 주었다는 바로 그 경관들을 계속 보게 됩니다. 곳곳에서 "판도라는 멀지만 장가계는 가깝다"는 홍보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아바타>에 나오는 이크란 모형도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사진 찍으면 돈 내야 합니다. 만리장성 위에도 '전문 사진사'가 사진 찍어주고 돈 받습니다. 사진에 나온 분들은 대만에서 온 관광객들입니다.) 



(찍어온 사진들을 보니, 바위산 사진이 엄청나게 많군요. ^^)

장가계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곳은 대협곡입니다. 석회수가 흐르며 큰 계곡을 만든 곳이라고 합니다. 첫 사진의 바위는 잘 보면 여성의 얼굴이 보입니다. 눈썹도 보입니다. 석회수가 계속 흐르고 있어 '머리 감는 여성'이라는 이름의 바위라는군요.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황룡동굴입니다. 땅굴을 제외하고 동굴은 태어나서 처음 가본 것 같습니다. 세계에서 두 번 째로 큰 동굴이라고 합니다. 동굴은 뭐 동굴이지요.



돌아오는 날은 네 시간 걸려 창사에 도착했습니다. 창사에 있는 호남박물관에 가고 싶었지만 패키지의 일정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겠지요. 

원래 밤 00시50분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예정이었지만 상하이의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오지 않아 항공사가 잡아 준 호텔에서 3시간 자고 4시에 일어나 공항에 실려오고 7시 35분 비행기를 탔습니다. 제가 타야 할 비행기가 상하이에서 인천에 갔다가 창사로 와야 하는데 상하이에서 뜨지 못했다더군요. 한국에 비가 엄청나게 왔던 날의 일입니다. 

이런 것이 대륙의 자연이구나, 생각하게 된 여행이었습니다. 덕분에 구이린(桂林)이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이곳의 관광객은 거의 대부분 한국인과 중국인입니다. 장강 유역이나 베이징, 상하이만 해도 서양인들이 무척 많은데 의외로 장가계에는 거의 없습니다. 일정 내내 서너 명으로 이루어진 팀 두엇을 보았을 뿐입니다. 이런 자연 풍광은 서양에서도 쉽게 볼 수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순수한 여행기는 이렇게 정리해 놓겠습니다. 그곳 관광지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좀 더 기록할 것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은 좀 곤란합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20120702-20120707
중국 장가계(张家界)
사용한 카메라: Canon 50D with EF-S 17-55mm lens and SONY dsc-w380
photographed by LEE EC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