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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9일 화요일

default 상태로의 회귀


상하이에서 핸드폰을 도난 당했다. 도난이다. 개통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았고 아직 첫 사용료도 청구되지 않은 새 전화기이다. 사람이 많아 움짝달싹 못하는 지하철에서 벌어진 일인 것 같다. 외투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잠가 놓았었는데 지하철에서 내려 무엇인가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지퍼가 열려 있고 그 안에 있던 핸드폰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지하철로 세 정거장을 움직이는 잠시 동안 일어난 일이다. 


by dullhunk, flickr.com 
최근 중국에서 핸드폰 분실은 흔한 일이 되었다특히 지금은 춘절을 앞둔 시기이기 때문에 소매치기가 더 많다고 한다훔쳐서 고향으로 가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런 사건의 '용의자'들은 모두 신장(新疆)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신장사람들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하미과 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여름에 주로 먹는 하미과가 주로 나오는 지역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왜 상하이의 소매치기는 모두 신장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일부 상하이 사람들은  신장 외에도 가난한 지역이 많지만 소매치기는 그들로 대표된다는 점에 대해서 인정했다. 한 친구는반은 농담이었지만다른 가난한 지역 사람들은 단결하지 못하는데 신장 사람들은 단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또한 그들은 다른 가난한 지역 사람들과 달리 외모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소매치기가 모두 신장 사람일리는 없다상하이 출신도 있을 것이고 다른 지역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신장이나 칭하이, 구이저우 등 가난한 지역 출신들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신장 사람들은 외모로 인해 한눈에 구별되는 '외지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외모에 의한 타자화를 통해 소매치기로 낙인 찍힌다외모에 의한 타자성이 행동과 사회적 존재감의 타자성으로 전환되는 사례가 바로 상하이의 신장 사람들이다.

어쨌거나 상하이를 다닌지 10년만에 처음이고 태어나서 처음 경험한 '소매치기'이다. 이 일 때문에 분실증명을 발급받기 위해 경찰서에도 다녀왔다.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쓴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다

10년 동안 상하이에 들인 정성과 관심이 부족했나보다. 내가 매번 상하이만을 이용해서 지금까지의 시간을 채워왔던 것이 못마땅했던 것일 수도 있다. 뭔가 가져가면서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으니 핸드폰이라도 가져감으로써 보상을 요구한 것일 수도 있다. 상하이의 한 친구는 내게 중국에서의 경험이 아직 충분치 않았던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신고를 담당한 경찰관은 나에게 분실 순간 음악을 듣고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음악을 듣고 있었다면 음악이 갑자기 멈추니 금세 알지 않았겠냐고 반문하니 이어폰 줄을 끊고 가져가는 경우도 흔한데 그렇더라도 이렇게 사람 많은 지역에서는 어어~” 하는 사이에 그 도둑은 사라지니 잡을 수 없다고,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 생각하라고 했다. 눈 멀쩡히 뜨고 있다가 핸드폰을 분실 혹은 소매치기 당한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인류학자가 현지에서 다양한 범죄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위협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죽음을 맞게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 상하이와 같은 복잡하고 현대화된 도시에서 인류학자로서의 정체성으로보다는 외국인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고 이번 일이 인류학자의 고생으로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지역에 대해 익숙한 사람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계속 아이폰을 쓰다가 안드로이드 폰으로 바꾼 것에 주변 사람들은 배신자라고 했지만 두 주 정도 사용하면서 즐거웠던 것은 그것을 나의 방식으로 '개성화 설정'(customizing)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customizing한 나의 핸드폰은 그것을 훔치는 동안 그 행위자가 아주 잠깐 동안 느꼈을 불안함과 뒤 이은 안도감 속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몇십 만 원의 수익으로 바뀐 후 (한글로 되어 있는 소프트웨어이니) 중국어 소프트웨어를 탑재한 후(이를 중국에서는 shuaji(刷机)라고 한다. 소프트웨어를 밀어버리고 새로 깐다는 뜻이다) 원래의 상태’(default)로 돌아가 낯선 땅 어디에선가 정규 상품보다 저렴한 가격에 새 주인을 만날 것이다. customized되어 있던 특별함, 독특함은 사라지고 평범하고 일반적인, 초기화 상태로 변해버리는 과정. 그것이 도난당한 폰이 맞이할 운명이다

그렇게 보니 이별은 모두 그 모양인 듯 하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누군가였던 사람이 이별의 과정을 통해 평범한, 무리 중의 하나로 변화하는 것. 특별하고 독특한 무엇을 잃어버린 채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무리 중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어서 이별은 슬픈 것이다

핸드폰도 그런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2011년 9월 3일 토요일

'하드모드'의 상하이

넘어져버린 레미콘

게임에 비유하자면 중국에서 사는 것은 하드 모드를 플레이하는 것과 같다.”
  
은행의 투자부에서 근무하는 상하이 청년 J는 생활을 위해 신경쓸 것이 너무 많다고 했다. 2012 1월 결혼을 앞두고 있는 그는 현재 신혼집 인테리어 때문에 바쁘게 지내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인테리어 업체와 계약을 하고 그들과 벽지, 장판 등을 상의하고 결정하면 업체가 알아서 일을 추진하는 반면 J는 벽지, 장판, 페인트 등 인테리어에 관련된 모든 요소들을 미래의 신부와 함께 결정하고 자재상가에 직접 가 사오고 시공하는 인부를 따로 불러 직접 감독하며 인테리어를 하고 있었다. 5월부터 시작했으니 꼬박 3개월 이상 매달린 셈이다. 한 푼이라도 더 남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중국 같은 사회에서는 인테리어 업체도 믿을 수 없단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손수 운반하지 않는 이상 원래의 계획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퇴근 후에 신혼집으로 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해결하고 가구나 설비 주문을 하면 연차휴가를 내고 물건을 받아 확인했다. 주말마다 신혼집 준비에 시간을 보내느라 밖에서 데이트하는 비용은 크게 줄었다고 한다. 그나마 자신은 집을 샀으니 다행이지 그 나이 대에 집이 없으면 지금은 결혼할 수 없다며 반쯤은 결혼에 대한 기대로 차 있고 다른 반쯤은 피곤함이 묻어 있는 눈으로 웃었다.

더운 여름날 한 카페 거리의 조각
이런 치열한 경쟁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액세서리를 직접 가져와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하는 한국인 H 역시 요즘 힘들다고 했다. 예전에는 디자인과 품질에서 우수한 한국상품이 잘 나갔었다. 지금은 그 시장 역시 경쟁이 치열하다. 중국 상인들이 서울 남대문에 와서 한국 물건들을 사가는데, H 10, 20개 사는 반면 그들은 100, 200개 이상 사서 중국 전역에 판다고 했다. 구입량이 다르니 가격 경쟁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일부 중국상인들의 경우 시장에서 자신들을 알리기 위해 정말 말 그대로 마진 하나 없이 팔기도 한다고 했다. 그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이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다. 이제 이 시장에 막 뛰어드는 사람들은 쉽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의 가게는 그나마 한 동안 잘 나갔던 징안쓰 지하상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30-100위안 정도의 물건이 잘 나갔다면 지금은 130-200원 이상의 물건들이 잘 나간다고 한다. 저렴한 중국산 상품에 대해 우위를 보이는 것은 차라리 고가품이라고 한다.

동서남북, 어디로? (한 화랑의 입구)
 하루 이틀 들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경쟁의 배경에는 중국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큰 변화가 자리잡고 있다. 일찌감치 경쟁에 뛰어들어 경제적으로 충분한 자원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상하이는 너무 살기 좋은 곳이다. 난징시루, 화이하이루, 그리고 곳곳에 위치한 백화점들에 있는 세계 각국의 명품상점들은 그들의 소비생활을 편리하게 해준다. 상하이에서의 일정이 며칠 동안 겹친 선배와 만나 이야기한 것처럼, 상하이는 서울이 따라갈 수 없는 글로벌 시티의 외양을 갖추고 있다. 각종 브랜드들의 플래그쉽 스토어들이 곳곳에 있고 서울에서 전문 상점을 보기 어려운 브랜드들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IWC, 오메가, 롤렉스 등 시계 매장들은 거리마다 하나둘 씩 있다. 이번에 본 가장 흥미로운 상점은 Leica 카메라 매장이었다. 화이하이루 한 백화점 앞에서는 뷰익 설명회를 하고 있었고 다른 백화점 앞에서는 페라리 설명회가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포르셰 매장도 있다)

백화점 앞 페라리 설명회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
 도시의 월급 수준은 아직 서울에 미치지 못하지만 물가는 서울을 능가하기 시작했으니 이 도시에서 조금은 버젓하게 살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경쟁과 압박은 상상을 초월한다. 시 중심에서 조금 많이 떨어진 지역이라도 방 두 개 거실 하나 있는 작은 집을 사려면  2억원 이상을 주어야 하고, 전세라는 개념이 없는 중국에서 조금은 번듯한 집에서 월세로 살기 위해서는 한 달 200만 원 정도를 내야 하는 상황. 상하이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20대 후반의 여성들은 최근 서울에 다녀왔는데 서울의 물가가 상하이보다 싸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한국의 드라마와 대중음악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고 매년 짧은 기간이지만 서울에 왔다 간다.)



한 백화점 앞의 시계
2011 7월 중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기 대비 6.5% 상승했다. 돼지고기는 1년 동안 56.7%가 올라 식품류 가격상승률은 14.8%에 달한다. 물가부터 복지, 안전 등의 문제를 포함하여 생활을 하기 위해 신경써야 할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한국사회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상하이 사람들이 체감하는 어려움의 정도는 상상 이상이다.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놀라운 경제성장을 하고 있고 조만간 세계가 두려워할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할 중국이라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 녹록치는 않다. 당분간은 하드 모드에서 계속 게임을 진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임이 어렵다고 이미 거쳐온 이지(easy) 모드를 다시 돌릴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런데 이지모드를 거치긴 한 걸까?)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고?

2011년 4월 1일 금요일

스펙터클을 통한 상징적 통합의 시도: 상하이 엑스포

그곳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도시였다. 여의도의 60%에 이르는 넓은 땅에 약 200여 개의 전시관이 들어섰다. 황푸(黄浦)강을 사이에 두고 푸둥(浦东)과 푸시(浦西)로 나누어 조성된 박람회장은 마치 강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뉘어 있는 상하이를 그대로 축소한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강에는 무료 셔틀 여객선이 여러 개의 항로를 따라 다니고 박람회장 내부 도로에도 무료 셔틀 버스가 다니며 관람객이 가고자 하는 전시관과 가까운 정류장까지 태워 주었다. 201051일부터 6개월 동안 이 버스와 여객선은 한반도 전체 인구수에 거의 육박하는 7300만 명의 관람객들을 태우고 내려 주었다.

박람회장 사이의 황푸강 동서를 잇는 무료여객선

1999128일 중국 정부가 2010년 엑스포 개최 신청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3년이 지나 상하이가 2010년 엑스포 개최지로 결정된 2002123, 상하이뿐 아니라 중국 전역이 들썩였다. 실제로 정부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 때보다 더 많은 공을 들였다는 이야기가 그리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푸둥, 난징루(南京路), 세기광장(世纪广场) 등 상하이 시내뿐 아니라 동네마다 민속악기를 동원한 축하 잔치가 밤새 이어졌고 선정 결과 발표 후 사나흘이 지나도록 상하이의 방송들은 관련 뉴스와 소식, 축하공연만으로 프로그램들을 채우고 있었다. 상하이 시 당위원회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报)>는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호외를 발행하여 상하이가 엑스포 개최지로 선정되었음을 알렸다. 복단대학(復旦大学), 교통대학(交通大学), 동화대학(东华大学), 상해대학(上海大学) 등을 포함하여 상하이의 각급 학교들은 강당이나 운동장에서 다양한 축하행사를 열었고 학생들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거나 자원봉사자로라도 참가하여 자신과 상하이와 중국의 능력을 보여주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상기된 표정과 쉰 목소리로 전달하였다.

상하이 엑스포 개최 성공 소식을 방송으로 보면서 내가 눈여겨 본 것은 축하 행사장 곳곳에 걸린 플래카드들이었다. 개최지 선정을 축하하는 슬로건들 중 눈에 띈 하나는 우리가 (베이징 올림픽 개최 성공에 이어) 또 다시 승리했다(我们又赢了)”라는 문구였다. 상하이 사람들에게 엑스포 유치는 성공을 넘어 승리를 자축할만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적으로 삼아 그를 쓰러뜨리고 쟁취하는 것이 승리라면 엑스포 개최 성공은 200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상하이가 지구화의 전쟁터에서 얻어낸 전리품이었다.

지하철 손잡이의 엑스포 광고


엑스포 유치가 확정된 후 상하이는 다시 변신하기 시작했다. 엑스포를 준비하면서 상하이가 보여준 변신 과정은 그 속도와 규모에 있어 가히 압도적이었다. 2년 정도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상하이를 떠나오던 2004년만 해도 3개 노선에 불과하던 지하철이 엑스포 개막에 맞추어 10개 노선으로 늘어났다. 여러 층으로 켜켜이 쌓인 순환도로와 고가도로에도 불구하고, 급증한 개인 차량들 덕에 출퇴근 시간이 아니더라도 상하이의 교통체증은 더 이상의 해결책은 찾을 수 없을 만큼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지하철이었고 10개의 노선이 상하이의 지하세계를 거미줄과 같은 모양으로 변화시켰다. 그런데 엑스포 개막일 이전까지 6-7개의 노선이 동시에 공사를 진행하느라 상하이 전역은 몸살을 앓았다. 막혀버린 도로 때문에 난 짜증은 시도때도 없이 울려대는 경적을 통해 청각적으로 전화(轉化)하였다. 가뜩이나 여름이 더운 상하이에서 차량과 건물의 열기, 그 열기를 누그러뜨리려는 에어컨의 또 다른 열기는 땀과 범벅이 되어 사람들의 코와 입을 턱턱 막았다. 2009년 만난 한 택시기사는 “사람들을 이렇게 불편하고 짜증나게 하면서까지 엑스포를 준비하는 것은 정부가 잘 못 하고 있는 것이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데 불가능해 보이던 지하철 공사, 푸둥과 푸시를 잇는 몇 개의 다리 건설, 도로 정비, 박람회장 공사는 2010년 5월 이전에 마치 마술의 힘을 빌린 것처럼 모두 끝나버렸다. 아주 오래 전부터 원래 그 모습으로 있어왔던 것처럼, 뚝딱거리는 기계음과 굴착기 소리가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엑스포가 개최되었다.

사람들은 보안과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정부의 설명에 큰 이견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모든 지하철역의 모든 통로에서 가방을 엑스레이 검사기에 통과시켰다. 엑스포의 중국관에 입장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 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몇 개 되지 않는 입구에 길게 줄을 서 입장을 기다리고 음식물, 긴 우산, 라이터 등은 반입이 되지 않는다는 말에 수긍하며 금속탐지기를 지나 ‘도시가 생활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城市让生活更美好; Better City, Better Life)’는 바로 그곳으로 들어가 현대 산업기술과 미디어의 발달을 시각적으로 경험하며 조금 전까지의 고생은 모두 망각의 강으로 던져 버렸다. 1918년 쑨중산(孙中山)이 [건국방략(建国方略)]에서 동방의 대(항구를 만들기 위한 거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푸둥에 서서 세계 192개 나라를 만나게 된 것이다이렇게 엑스포는 그 시간 상하이에서 경험하는 일상이 되었다

관심

엑스포가 일상의 한 영역으로 들어오자마자 새로운 업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국관 입장을 위한 번호표를 받기 위해 이른 새벽에 대신 줄 서주는 직업이 생겼으며 박람회장 곳곳에서 자신들이 구한 중국관 입장용 번호표를 적절한 가격에 판매하는 암표상들이 생겨났다. 한 전시관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1-2시간, 유명 전시관에서는 최장 7시간까지 줄을 서야 하는 상황에서 10위안짜리 휴대용 의자는 박람회장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를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직업의 귀천이나 합법성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휴대용 의자

1851년 런던에서 처음 열렸던 만국박람회가 그랬던 것처럼 2010년의 상하이 엑스포 역시 시각적 경험으로 구성되었다. 150년 이전 박람회를 통해 사람들은 근대를 경험하고 상품의 세계를 만났다면 그로부터 150년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상하이 사람들은 디지털 미디어의 화려한 세계를 목격하였다.

사실 신기한 볼거리라는 것이 상하이 사람들에게 그리 새로운 경험은 아니다. 남경조약 이후 상하이는 서구의 문물과 생활방식이 유입되는 중요한 통로였고 1930년대 이전까지 동양의 파리라 불릴 정도의 면모를 갖추고 있던 곳이라 엑스포의 개최를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라 하기는 어렵다. 엑스포가 보여준 것은 오히려 시각적 스펙터클을 동원한 상징적 통합의 시도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행사장에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이미지들로 채워진 볼거리들을 장치하고 그 볼거리를 보러 온 사람들이 상하이의 뜨거운 햇볕아래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하게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것이 또 다시 볼거리가 되면서 엑스포의 상징적 가치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이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게 되었으니 이 정도의 고생은 참아낼 만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 그리고 여기에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알리는, 매일 다른 장면을 사용하지만 전달하는 내용은 반복되는 화면들. 이는 매일 밤 뉴스를 통해, 언론을 통해 재생산된다. 매일 새벽부터 와서 열 번 혹은 스무 번 이상 관람한 관람객을 찾아내 전하는 흥분된 인터뷰, 기대에 찬 상기된 표정으로 줄을 서있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엑스포가 만들어낸 보다 중요한 볼거리였다.
우리가 또 승리했다는 구호에서 볼 수 있던 것처럼 엑스포가 강조한 것은 우리 중국이었다. 과도한 빈부격차와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는 동요를 저지하고 우리 중국이라는 경계 안에서 그 개인들을 통합시키는 것이 엑스포의 열망이었다. 이 열망은 엑스포 개최에 맞춰 전세계에 퍼져 있는 화교들을 대상으로 엑스포 관람 캠페인을 실시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화교 여러분, 고향에 와 엑스포를 관람하세요"(华侨华人回家看世博)라는 제목의 프로모션이 그것이다. 자본을 가지고 있고 외부 세계에 대한 경험까지 있는 화교들에게 자신감을 계속 불어 넣어주고 그들이 '우리 중국'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 이를 통해 계속 성장하고 있는 중국이 더 큰 탄력을 받고자 하는 욕망을 이 프로모션에서 읽어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엑스포 내 상하이관의 타일그림의 벽. 일정 시간마다 그림이 바뀐다. 




또한 도시의 이벤트가 국가 전체의 이벤트가 되고 연해지역과 동부의 일부 도시들이 중국 전체를 견인하는 현 중국의 특징 역시 엑스포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论)’을 실천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 실천의 결과가 모든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도시가 생활을 더욱 아름답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생활이 그 도시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일상에 엑스포는 그렇게 들어왔고 그렇게 사라졌다. 상하이 사람들은 마치 의례를 통과한 것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관광 특수를 맞아 올랐던 각종 요금과 물가는 그러나 제자리를 찾지는 않았다

(이 글은 인천대 HK중국관행연구사업단 웹진에 쓴 글입니다. 이곳에 옮기면서 사진 일부는 바꾸어 올립니다. 웹진 글은 이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2010년 10월 17일 일요일

상하이에 다녀왔습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마지막 포스트를 쓴 것이 한 달도 넘었네요. 그 이전에 아주 열심히 만들던 블로그는 분명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달이나 방치해 둔 것이 좀 미안하네요. 게으름이라기보다는 바쁨의 결과였다고 굳이 변명을 늘어놓고 오랜만에 포스팅 하나 합니다.

2010년 올해는 두 차례 상하이에 다녀왔습니다. 한여름에는 조사차, 9월에는 보충조사도 하고 상하이 엑스포도 관람할 목적이었습니다. (사실 엑스포를 보기로 한 것은 오래 전 결정된 일이었습니다. 엑스포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로 올리려 합니다.) 조사의 목적도 있었지만 아주 오랜만에 저와 마눌님이 스스로에게 주는 휴가이기도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쌓인 일들 때문에 돌아와서는 잠시 (사실은 지금까지) 허덕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재미도 있었구요.

1842년 아편전쟁의 종결, 그리고 그 결과로 체결된 남경조약에 의해 개항된 상하이는 중국의 다른 도시보다 더 빠르게 '근대화'된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그 이전까지 유럽의 어떤 지역들보다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강한 힘을 자랑하던 중국에 서구열강의 조계지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치욕스러운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의 근대화를 가능하게 했고 이후 있을 경제적 성장의 첫 걸음을 내딛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오늘날 상하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대단한 자신감의 출발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상하이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그들의 자신감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다양한 변화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 변화들 중 하나는 소비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고 역시 중국답게 그 규모 역시 큼직큼직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크기로 따지면 상하이보다는 베이징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상하이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베이징보다 좀 더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쇼핑의 공간 正大广场
푸동의 한 쇼핑몰입니다. 가운데에 넓직한 공간을 두고 사방으로 뻗어있는 모습이 사람들을 혹하게 합니다. 최근 상하이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백화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COSTA Coffee
크기로 따지면 커피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게 중간 사이즈. 같이 놓인 아이폰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게 '표준' 사이즈라는 거. 추가요금을 내면 더 큰 컵도 가능합니다. 배터져 죽을지도 모릅니다.

크기도 크기지만 화려함 역시 중요한 특징입니다. 와이탄이나 푸동의 야경도 그렇고 황푸강의 서쪽에서 푸동까지 연결된 지하터널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상하이가 이런 'modernity'(라고 포장된 것에)만 집착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실제로는 처음 본 변검 공연입니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곳.
마오쩌둥이 상하이에서 머물던 곳

밀랍으로 만든 젊은 마오쩌둥의 모습
상하이의 마오쩌둥 옛 집입니다.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신분증(외국인은 여권)만 제시하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습니다. 난징시루 지하철역 근처에 있습니다.
중국의 어디나 그렇지만 공산당의 첫 대표자대회가 열렸던 곳인만큼 상하이에도 시내 곳곳에 혁명과 공산당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찾는 것은 아니지만 관광객들,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간혹 찾아옵니다. 일부 서구학자들은 혁명과 전통, 과거로 포장된 중국이라는 이미지의 소비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만 중국인들에게는 어쨌거나 놓아버릴 수 없는 경험과 기억으로 존재하는 시간이겠지요.

저에게 중국을 한 마디로 설명하라고 하면 제가 선택하는 단어는 '다양성'입니다.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모습, 다양한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며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의미가 어떨 때는 충돌하고 어떨 때는 공모하는 공간. 그곳에 다녀온 기록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2010년 9월 15일 수요일

상하이 구찌 매장의 보안요원들


푸동 구찌 매장앞 보안요원들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하이 같은 도시의 보안요원들(특정 건물의 경비와 출입자 및 차량의 통제와 안내를 담당하는 직원들)중에는 근처 농촌에서 돈벌이를 찾아 도시로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핍진한 중국 농촌을 벗어나 도시에 온 사람들. 비공식적 통계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이 1억 명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그나마 이런 곳에서 근무하면 잘 곳, 먹을 것이 해결되고 작은 식당이나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생활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상하이 도심의 비싼 물가만 감당할 수 있다면 좋은 직장입니다.

이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 복잡한 도시에 오도록 한 그 희망과 기대가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외지인들에 대한 눈총, 멸시, 가끔 들어야 하는 욕지거리와 짜증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이들의 희망과 꿈과 큰 기대를 꺾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돈 많이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 혹은 지금 있는 곳으로 가족을 불러 작은 식당이라도 하나 열어 바쁘고 즐겁게 살기를 바라는 꿈이 하루 빨리 실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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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0일 금요일

우회전 금지

마오쩌둥이 확고하게 정권을 잡고 있던 시절 덩샤오핑은 '주자파'로 몰려 곤혹스러운 일을 당해야 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중국 사회 전체를 'hold'시켰던 문화혁명이 끝난 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개혁의 방향이 그 유명한, 쓰촨의 속담을 인용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으로 단순화될 수는 없다. 그는 여전히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자본주의와 완전하게 동일하지는 않은, 표현 그대로의 의미를 가진 '중국식 사회주의'를 꿈꾸는 지도자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부유해진다는 의미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의미와는 다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부는 국민에게 속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부유해진다는 말은 국민 전체의 번영을 뜻한다. 사회주의 원칙은 첫째로는 생산력의 발전, 둘째로는 공동번영이다. 우리는 공동번영을 더욱 신속하게 달성하기 위해 일부 국민과 지역이 먼저 번영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정책이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양극화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이다." (1986년 덩샤오핑. 외신기자와의 인터뷰, [메가트렌드 차이나]에서 재인용)

덩샤오핑이 꿈꾸던, 양극화를 걱정하지 않는 중국은 어디에 갔을까?
어느 무엇도 그것을 넘어설 수 없는 힘을 가진 자본이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격차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중국은 덩샤오핑이 그렇게 자신있게 말하던 그 중국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한 번에 벤틀리 여섯 대를 현금으로 구입해 로비에 사용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 두 달에 한 번 스위스로 날아가 보톡스 주사를 맞고 오는 아가씨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곳이 중국이다. 현금이 많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

반면 <차이나 블루>라는 다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 달 월급 약 350-500위안, 그나마도 더 나은 조건의 공장으로 쉽게 옮겨가는 것을 막기 위해 첫 달 월급은 일종의 '야진(보증금)'으로 떼이고 회사로부터 돈을 빌리는 형식으로 살아야하니 서너 달은 지나야 비로소 돈을 만져보게 되는 노동자들의 삶도 중국에는 공존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는 사람들이 갖는 단 한 가지의 희망은 돈이다. 빈부격차건 뭐건 일단 나와 나의 가족이 먹고 살고 보다 풍족하게 사는 것이 내가 만난 거의 대부분의 중국사람들의 희망이다.

201007 SHANGHAI


일본이나 영국을 제외하고 차와 사람이 오른쪽 방향으로 진행하는 곳에서 우회전 금지 신호를 간혹 발견할 수 있다. 우회전 금지 신호가 그리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회전은 신호를 받지 않고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덩샤오핑이 장담했던 바가 이제 와서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

물론 나는 중국이 사회주의에 대한 지향을 포기하고 서구형태의 자본주의 방식으로 완전히 급선회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레토릭 역시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단지 레토릭에 멈추는 것도 분명 아니다.

그러나 저 우회전 신호가 항상 붉은색만 들어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초록색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리는 운전자들이 정지선에 서있다. 그들에게 저 우회전 금지신호는 아주 귀찮은 존재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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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2일 목요일

인터넷 엑스포

(2010년 4월 29일 쓴 글입니다. 이전 블로그에서 옮겨 온 것입니다.)


"网上世博"

5월 1일 개막을 앞둔 상하이 엑스포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전시장이고 다양한 매체들의 실험장이 될 것이라고 주최측은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08년 올림픽을 성대하게 치뤄내었(다고 믿)고 이제 그 경험을 엑스포에까지 연결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과학기술을 충분히 과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중국의 인터넷은 아주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인터넷 사용 현황과 관련 정보는 이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발전의 성과를 엑스포를 통해 과시하려는 욕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1851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부터 이런 전시회는 근대성/현대성을 보여주는 데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비단 엑스포 혹은 만국박람회가 아니라 할지라도 무엇인가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은 어떤 사회나,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까요.

중국의 입장에서는 2008년 올림픽을 통해 화려함을 보여주었고 이제 2년이 지난 지금 엑스포를 통해 자신들의 현대화된 모습, 기술적 진보 등을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엑스포의 각 전시관마다 인터넷을 이용한 설명을 제공하고 갖가지 체험을 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터넷의 발전은 여러 장점이 있습니다. 이전까지 정부나 권력에 독점되었던 '말하기 채널'이 다변화되고, 제한된 수준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거나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장점이 중국에 그대로 적용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최근 구글의 철수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이 과시하고 싶은 인터넷 기술의 발전과 인프라의 구축은 역시나 '제한된 수준'에서만 이용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뭐 최근 한국의 상황도 그리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 씁쓸합니다만.)
아직도 여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중국이 그토록 자랑하고 싶어하는 과학기술의 혜택으로부터 크게 소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개방. 소통, 공유라는 웹 2.0 시대 인터넷의 철학이 납득할만한 수준으로 제대로 통용되고 있는 것도 아니구요.

상하이 엑스포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놀라운 성과를 보여줄 것입니다. 저 역시 보고 싶고, 제 눈으로 본다면 정말 놀랍고 신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조직위원회와 관계 기관이 '인터넷 엑스포'에 대해서 자신있게 여러 차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정말 잘 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휘황찬란함에 가려진 몇 가지 현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기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인터넷의 '인'이라는 글자도 생각하지 못하고 먹고 살기 위해 오늘 하루도 온종일 애쓰며 땀 흘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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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와 화교

(2010년 4월 27일 쓴 글입니다. 이전 블로그에서 옮겨 온 것입니다)


"세계 인민 대단결 만세!"




천안문 광장에 걸려 있는 문구입니다.
바로 옆에 걸려 있는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그리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유명한 표현과 거의 항상 댓구를 형성하는 바로 그 문구입니다.

위 사진은 제가 2003년 찍은 것인데요, 오늘 아침 갑자기 사진 폴더 아래 깊숙히 감추어져 있던 이 파일이 생각난 것은 아침 출근길에 들었던 팟캐스트 때문이었습니다.  2010년 상하이 엑스포 홍보를 위해 만들어진 팟캐스트 중 해외 화교들에게 엑스포 관람을 홍보하는 에피소드였습니다. 프로모션 기간 중 엑스포 티켓을 구입하는 화교들에게 특혜가 주어지며 상하이에 도착하면 공항에서부터 각종 편의가 주어질 것이다, 심지어 노인들의 경우는 더 많은 혜택이 있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프로모션 활동의 제목은 "화교들이여, 고향에 와 엑스포를 관람하세요"(华侨华人回家看世博) 입니다.

이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웹사이트 소개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http://www.overseas-expo2010.com

아래는 이 사이트의 초기 화면입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이 방송을 들으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은, 중국 본토에 거주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해외에서 생활하고 있는 화교들까지 중국이라는 영역권에 넣으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자본과 외부 세계에 대한 경험까지 겸비하고 있는 화교들에게 자신감을 계속 불어 넣어주고 그들이 '조국'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 이를 통해 계속 성장하고 있는 중국이 더 큰 탄력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이와 같은 프로모션에서도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은) 무섭게도 느껴졌던 것이지요. '중국 위협론' 따위를 들먹이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런 다양한 힘이 어떤 동력을 만들어낼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 정도 이야기하려 합니다.

물론, 한국사회 또는 다른 사회들도 이런 움직임은 항상 있어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다른 것은, 화교들의 경우 이런 프로모션 활동에 실제로 참여하고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막강한 자본(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5월 1일 개막하는 상하이 엑스포에 분명 많은 화교들이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고 꽤 먼 곳에서도 많이 올 것입니다. (오늘 들은 내용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화교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모션이었습니다.) 이는 엑스포의 '성공적 개최'라는 성과와는 또 다른 성과로 여겨지고 그렇게 오랫동안 선전될 것입니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어떤 힘을 발휘하게 될지는 계속 주목해 봐야겠지요.

중국은 이번 엑스포를 통해 "도시와 생활을 더 아름답게 하자"는 공식적 슬로건 외에 이렇게도 외치고 싶을지 모릅니다.

"전세계 화교 대단결 만세!!"

화교의 힘...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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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일 수요일

유일한 선택

비오는 날 상하이 한 거리의 모습. 좀처럼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은 하늘로 시작했던 하루. 비가 와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다. 색색의 비옷을 (마치 비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입고 그저 자신이 가던 그 길을 가는 사람들. 이미 많은 굴곡과 험로를 거쳐 온 사람들. 이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가던 길을 꾸준히 가는 것, 그것이 이시기를 살아가는 상하이사람들의 유일한 선택이다. 


201007 Shang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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