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저 재미있길래 공유했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를 기본적인 수학과 물리학으로 설명한 동영상이다. 페이스북에서 공유된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재미있었다.
이 이론에 대해 집의 위치가 실제로는 균일하지 않다거나, 굴뚝이 없는 아파트는 묶음배송을 할 것인가, 경비실에 맡길 것인가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변수들을 통제한 모델을 만들어야 이론화가 가능할테니 사소한 문제들은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오류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아이들의 수가 과도하게 계상되었다는 것일테다.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는 아이들은 제외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물론 '우는 행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눈물이 최소 0.5ml이상 흘러야 한다거나, 눈물이 나지 않더라도 60db 이상의 성대 긁는 소리가 5초 이상 있을 경우는 우는 것으로 간주한다거나, 눈물과 소리가 최소 2분 이상 지속해야 한다거나 하는 등의 기준이 필요하다. 원래 가사에 '산타할아버지는 리스트를 만들어 두 번 이상 체크하신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봐서 리스트에 체크를 할 정도의 기간, 즉 '전년도 12월 26일부터 당해년도 12월 23일까지'와 같은 기준은 이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는 아이를 선별하는 기준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산타만의 재량이라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산타 1인에게 이렇게 막대한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타당한가, 산타가 만약 자기 마음대로 기준을 바꿨을 때 그에 대한 제재가 가능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있다면 결국 우는 아이 선별 기준에 대한 사회적 제도화가 필요한 것이다.
12월 24일 산타에 의한 소닉붐, 그리고 그로 인한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어떤 분들은 산타의 수를 늘리면 어떤가, 라고 제안해 주셨다. 그렇다면 그 적정수는 어느 정도일까? 지역별로 할당하여 배치할 것인가, 31시간을 시간으로 나누어 3교대 혹은 4교대 방식으로 운영할 것인가 등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제일 쉬운 방법은 3억 명 아이들이 약 8570만 가구에 산다고 하니 그 정도 수의 산타 혹은 대행을 통해 선물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현재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각 집의 부모들이 산타의 하청을 받아 선물을 전달하는 방식.)
이 외에도 순록의 과도한 노동강도를 지적해 준 분도 있다.
위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소닉붐으로 지구가 멸망하게 되었을 때 좀 더 중요한 문제는, 산타의 존재를 모르는/산타의 존재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 사는 17억 명 정도의 아이들이다. 이들이 인지하는 세상 속에는 산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산타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게 된다면 산타의 존재를 모르는 아이들은 지구가 멸망하는 것에 대해 전혀 대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믿지도 않고 존재조차 모르는 존재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지구가 멸망하게 되었는지 납득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현재도 자신들이 모르는 이유로 고통받는 많은 어린이가 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벌어지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회의 사람들은 왜 자신의 마을이 전쟁에 휩싸여 있는지 명확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공포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최근의 한 사진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들에게 12월 24일 지구 멸망을 미리 대비시키기 위해서는 산타의 존재를 믿는 다른 사회의 믿음체계를 먼저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나서야 산타에 의한 소닉붐이라는 과학적 현상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간의 대화가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지구가 멸망하는 것은 과연 나쁜 일인가와 같은 철학적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겠다.
재미있자고 한 이야기를 다큐로 받는 것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쓰다보니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은 상상력의 산물 혹은 상징적 서사에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뼈속까지 고착된 노동, 가치, 독점시장, 권력, 제도화 등의 용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막고 동심을 파괴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2016년 8월 19일 금요일
2015년 6월 25일 목요일
청년과 청춘
1970년대와 80년대의 경우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어떻든간에 소위 ‘청년문화’라는 것이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포크, 생맥주, 청바지로 대표되는 것이든 화염병과 ‘가투’, 그리고 뒤이어 막걸리 집에서 고래고래 소리 높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방식이든, 청년(靑年)들, 즉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특정 세대로 범주화되는 집단의 독자적인 문화적 양식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청년이 이와 같은 '대학문화'에 익숙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을 다루는 많은 책들에서는 소위 <쎄시봉>으로 대표되는 포크가 당시 청년들의 특징적인 대중문화 장르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부에 국한된 사실일 뿐이다. 포크와 청바지가 도시 지식청년들의 상징으로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남진과 나훈아의 음악은 당시 노동청년들을 중심으로 청년문화의 또 다른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대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들이 청년 대신 청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면서 음악의 영역에서 70-80년대에 필적할 청년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대략 청춘이라는 용어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20대들이 즐기고 좋아하는 소위 '문화적 장르'는 무엇일까? 그 시절 <쎄시봉>이나, 남진, 나훈아처럼 현재의 젊음을 상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70년대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 남진과 나훈아, 80년대 산울림, 송골매, 조용필, 그리고 뒤 이어 김광석, 이문세 등이 담당했던 역할을 지금의 대중문화 영역에서 찾는다면 누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가 '청춘'이라 부르는 세대의 대표적 상징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중문화 시장을 장악한 아이돌에 대한 열광은 10대의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비생산적 혹은 잉여적 삶으로 치부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20대가 되면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로 숨어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롤(League Of Legend)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것들은 ('팬질'과 유사한 이유로) 그다지 자랑할만한 일이 되지 않는다. 고군분투하고 열정을 드러내며 아파도 참아야 하는(!?) 청춘들에게 노는 일은 '잉여들이나 하는 짓'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감춰야 할 것이지 자랑삼아 드러내기는 어려운 일이 되었다.
어쩌면 청년이라는 용어대신 청춘이라는 용어를 갖게 된 것이 세대의 특징을 잃어버린 것의 표식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봄이라는 비유를 통해 '청춘'이 타자들에 의해 재현되는 순간부터 그들의 '상태'는 누구나 겪는 것, 지나가면 추억거리가 될터이니 지금은 각자 잘 알아서 견뎌야 하는 환상으로, 열정과 낭만이라는 허울의 포장으로만 남겨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청춘'은 스스로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 존재로만 여겨지고 그들의 현실은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일이 아니라 그들 자신만의 문제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특징을 상실한 것이 그들의 책임인가?
그런데 그 특징을 상실한 것이 그들의 책임인가?
모두가 거쳐야 하거나 거쳤던 상황이지만 연속성은 단절되고 하나의 상태로만 뚝 떼내어져 그들 자신이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단계에 놓인, 청춘이라는 이름의 청년들. 사회에 의해 주어진 시련과 아픔이지만 정작 그에 대한 처방은 스스로 해야 하는 현실 속의 존재들. 이 존재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듣고 싶었다. 이번 학기 교양 수업에서 학기 후반에 청년에 대해 다루기로 한 것은 그 이유였다. (아래에서 파란글씨의, 들여쓴 문단의 글들은 수업에서 학생들이 쓴 것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발췌는 문맥의 희생을 필연적인 대가로 삼지만 그 절절함을 고스란히 전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행위이다.)
오래 전 이 블로그에서 썼던 것처럼, 어릴 때 각자의 꿈은 다양했었는데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오로지 하나의 꿈, 즉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 남는다.
살아가는 모습으로서의 문화를 다루는 교양수업에서 청년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던 것은, 아프리카 부시맨이나 아마존 열대우림의 부족이나 중국의 소수민족을 다루는 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도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입이 아닌 청년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럴듯한 대답은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 밖의 시선으로, 나의 어설픈 경험으로 프레임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꼰대들 어법은 이것이다: “나도 그만할 때 더 심한 어려움을 겪고 여기에 온거야. 그러니 엄살피우지 마. 젊을 때는 원래 그런거야.” 그리고 덧붙인다. “그러니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해라’ 혹은 ‘힘내’라는 말처럼 무책임한 말은 없다. 결국 잘못되거나 실패할 경우 그 책임은 ‘열심히 하지 않은 자신’ 혹은 ‘힘내지 않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힘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이다. 자기계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을 개인에게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럴듯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열심히 해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열심히 하자”는 말은 하고 싶다. 어두운 동굴이라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여럿이 앞뒤로 손잡고 가는게 그나마 낫지 않은가.
오래 전 이 블로그에서 썼던 것처럼, 어릴 때 각자의 꿈은 다양했었는데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오로지 하나의 꿈, 즉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 남는다.
대학은 우리에게 마치 약관동의처럼 군다. 동의해야만, 선택해야만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면서 말이다. 우리는 방법이 없다. 선택하는 수밖에. (김**)대학에 들어오면 '넓게 생각하고 폭넓게 배우는 것'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취업'이라는 단 하나의 꿈을 강요받는다. 이 과정에서 '자기계발'이라는 포장은 모든 것을 개인의 역량에 맡기며 경쟁을 정당화한다. 열정페이와, 미래를 알 수 없는 '자발적 피착취'의 전형인 대외활동과 인턴 역시 '자기계발'의 과정이고 자기 노력의 산물이(라고 각인된)다. 자기계발서들은 '긍정에 대한 강박'을 만드는데, 긍정에 대한 강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안 좋은 상황이나 문제들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도록 한다는 점에서 외부의 문제를 문제로 지적하기보다는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에 대해서는 이원석 2013 [거대한 사기극: 자기계발서 권하는 사회의 허와 실](북바이북)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지도 않은 미래에 치여 산다. 나보다 뒤에 있는 과거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앞서있는 미래에 쫓긴다. 내가 정해놓은 미래가 다가오기 전에 해야만 한다고 일컬어지는 일들을 해내야 한다. 몇 살 전에는 어학연수를 갔다 와야 하고, 몇 살 쯤에는 인턴을 해야 하고, 취업이 되어 있어야 한다. 대학생의 생활은 자신을 다 담지도 못하는 자기소개서를 벗어날 수 없다. (조**)
초등학교 때에는 하면 즐거울 일을 꿈으로 삼았지만 대학생이 되어서는 하면 덜 괴로운 일을 꿈으로 갖게 되었다. 그리고 포기에 익숙해져버렸다. (권**)
대학교는 힘들었다. 생각했던 푸르른 나날보다 까만 날들이 더 많았다. 대학 생활은 돈과 사랑을 포기해야 얻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돈을 얻으려면 대학과 연애를 포기하면 됐고, 연애를 얻으려면 돈과 대학을 포기하면 됐다. 셋 다 가지고 싶었던 나는 알바도, 연애도 놓지 않았다. 물론 학업도. 그래서 얻은 건 하나였다. 병. 몸과 마음의 병. 사람들은 그걸 젊음의 흔적, 청춘의 표식이라고 그럴싸한 포장지를 둘러주었다. (황**)
무엇을 내어줘야지 이 끔찍한 물질만능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을 수 있을까, 무엇을 내어줘야지 난 내 꿈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 영혼과 자존심을 다 내걸어도 힘들 것이다. 평생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지만, 지금의 청년들의 삶은 좋아하는 것 하나를 이루기에도 벅차다. (송**)사회는, 그리고 '기성세대'는 '청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의 상당수는 청년들의 삶의 가운데에 서서 함께 세상을 보려 하지않고 '나도 한 때 그랬지'라는 경험적 오만의 표정을 지닌 채 외부에서 이야기하려 한다. 나도 예전에 트위터에 이렇게 썼던 적이 있다: "이십대에서 발견되는 다양성을 무시하고 그들을 프리터족, 니트족, 캥거루족 등의 단일한 용어로 묶어내는 것은 이십대를 설명하려고는 하지만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는 시도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정작 자신은 한 번도 아파본 적 없는, 삶에 굴곡이라곤 없었을 것 같던 약력의 이름난 교수가 그런 이름으로 책을 냈다. 책은 베스트셀러라는 명칭을 얻어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전 세계 수십, 수백, 수천만의 아픈 청춘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나도 그 아픈 청춘들 중 하나였다. 책에서 얻고자 한 건 내가 왜 이렇게 아픈지, 내가 왜 이렇게 힘든 건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지만, 책은 나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말했다. ‘네 탓’ 이라고. 아마 그 책을 산 사람들은 덧난 상처에 바를 약을 찾고 싶었던 것 같은데, 후시딘이 아니라 물파스를 산 것 같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아픈 청춘들은 마음 한 구석이 쓰라리고 또 쓰라렸다. (황**)
한국 사회에서의 청년들은 기성세대라는 수많은 관객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외줄의 중간에 위태롭게 서있다. 무섭다고 뒤로 물러서면 “젊은이니까 더 거대한 꿈을 키워야한다. 꿈꾸지 않는다면, 돌아오지 않을 젊음을 낭비하는 것이다”라며 관객들에게 야유를 받을 것이고, 무서움을 이겨내 앞으로 나아가 보아도 “그것은 현실성이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만둬라”라며 오히려 더 호되게 관객들에게 야유를 받게 된다. (권**)청년들 자신이 정의한 청년은 "성장하지 못하더라도,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사회에 맞춘 삶 속에 청춘은 없다. 청춘, 봄이라더니 세상에 꽃 한 송이 피지 않은 봄은 없다. 남들이 그렇게나 청춘이라던, 그래서 부러워하던 스물 한 살의 중반에 서있는데, 나는 그렇다. 잡초라도 무성하게 자라면 날이라도 풀렸구나 할 테지만 아직까지 현실은 민둥산이 내 전부이다. 남들도 이럴지도 모른다. 물론 아닌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다들 꽃핀 봄을 웃음으로 지내고 있었으면. 언젠간 버티다가 보면 꽃은 필 거라고 생각한다. 가시뿐이라고 믿었던 선인장도 오래고 더딜지도 모르지만 언젠간 꽃은 피니까. 이외수가 그랬다. 존버 정신. 그냥 엄청나게 버티는 게 청춘의 전부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버티는 건 젊음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니까. (황**)한국사회는 청년들의 희생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근간이 된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 희생이 청년들 자신의 미래를 위한 자원이 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근저에 깔린 생각이다.
살아가는 모습으로서의 문화를 다루는 교양수업에서 청년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던 것은, 아프리카 부시맨이나 아마존 열대우림의 부족이나 중국의 소수민족을 다루는 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도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입이 아닌 청년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럴듯한 대답은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 밖의 시선으로, 나의 어설픈 경험으로 프레임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꼰대들 어법은 이것이다: “나도 그만할 때 더 심한 어려움을 겪고 여기에 온거야. 그러니 엄살피우지 마. 젊을 때는 원래 그런거야.” 그리고 덧붙인다. “그러니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해라’ 혹은 ‘힘내’라는 말처럼 무책임한 말은 없다. 결국 잘못되거나 실패할 경우 그 책임은 ‘열심히 하지 않은 자신’ 혹은 ‘힘내지 않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힘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이다. 자기계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을 개인에게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럴듯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열심히 해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열심히 하자”는 말은 하고 싶다. 어두운 동굴이라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여럿이 앞뒤로 손잡고 가는게 그나마 낫지 않은가.
2015년 6월 12일 금요일
삶의 끝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삶
(이 글은 한국 외방선교회 소식지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2015년 여름 호(통권 97호) "문화 이해하기"에 쓴 글입니다. 게재된 글은 한국외방선교회 홈페이지(http://www.kms75.or.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철학자 마크 롤랜즈는 11년 동안 늑대와 함께 살았다. 보름달이 뜬 날 구슬프게 우는, 덩치가 산만 하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무장한, 번뜩이는 눈을 가진 바로 그 늑대 말이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소설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처럼 늑대소년으로 자랐다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개를 키워왔던 경험이 있던 그는 브레닌이라는 이름의 늑대를 새끼 때부터 키우기 시작해 11년 동안 함께 살았다. 그는 자신이 쓴 [철학자와 늑대](2012, 추수밭)라는 책을 통해 늑대와 함께 산 이야기와, 늑대가 죽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삶을 상대화한다. 늑대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을 바라보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며 인간의 삶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에 묶여 있는 존재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좇는 존재이다. 우리 삶의 의미와 삶의 끝은 시간의 선을 한참 따라 내려간 후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의 선은 우리를 매혹시키기도 하고 공포에 떨게도 한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고통이다.” (280쪽)
신을 제외한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삶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어떤 상태이다. 마크 롤랜즈가 쓴 것과 같이 삶이라는 시간의 선을 끝까지 따라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것이 죽음인데 그 선의 끝이 도대체 어디인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그 끝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선을 따라가는 여정은 어느 순간부터 두려운 길이 된다. 게다가, 그 끝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는 어떤 살아있는 인간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은 증폭된다. 미지의 것은 항상 두려운 법이니까.
셸리 케이건은 ‘죽음은 왜 나쁜가?’라는 질문에 대해 “죽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존재는 왜 나쁜 것인가?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있으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좋은 것들을 죽고 나면 하나도 누릴 수 없다.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했다([죽음이란 무엇인가], 서울: 엘도라도, 304쪽). 마크 롤랜즈 역시 “죽음은 우리로부터 미래를 박탈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고 했다. 미지의 상태이고 예측할 수 없고 삶의 여러 가능성을 빼앗는 죽음은 인간에게 두렵지만 피할 수는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죽음이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미지의 것, 설명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는 무엇일 뿐이라면 그것은 너무 두렵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고 그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낸 성긴 조합이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문화라 부른다면, 죽음과 같은 미지의 상태를 설명 가능한 영역으로 만드는 데에도 문화가 작동한다. 거의 대부분의 사회에서 죽음이라는 미지의 상태를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의미들을 부여하여 이해 가능한 영역으로 만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자신들의 문화적 체계 안에 포용하여 그 역시 살아갈만한 어떤 것으로 만드는 시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죽음을 다루는 문화적 태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중국, 라오스 등에 있는 몽족의 언어에서 태반을 가리키는 말은 ‘저고리’라는 뜻이다. 몽족 중 누군가가 죽으면 그 혼은 자기가 살아온 곳을 되짚어 올라가 저고리인 태반이 묻힌 곳까지 가서 그것을 입어야 한다. 태어날 때 입었던 옷을 다시 입어야만 혼이 길을 떠날 수 있다. 죽은 사람의 혼이 자기 저고리를 찾지 못하면, 그 혼은 영원히 벌거벗은 외톨이로 이승을 떠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면 태반을 잘 묻어야 한다. 몽족에게 죽음에 대한 준비는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티베트에서는 조장(鳥葬) 혹은 천장(天葬)이라 부르는 방식의 장례가 있다. 망자의 시신은 웅크린 자세로 흰 천에 싸고 포대에 넣어 장례 의례가 거행될 장소로 운반된다. 그곳에서 천장사들의 손에 들린 도끼와 칼, 망치 등으로 잘게 쪼개져 독수리, 까마귀 등에게 ‘보시’된다. 새가 깨끗하게 먹어야 영혼이 잘 환생한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토라자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을 앉은 자세로 고인돌에 모시고 몇 년 후에 장례를 치르기도 한다. 저승 가는 길에는 소의 영혼을 타고 가야 하는데 남은 가족들이 충분한 소를 모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망자의 영혼을 저승에 모실 충분한 소를 모으면 그제서야 장례를 행한다.
다양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을 다루는 다양한 문화적 태도들의 사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의 수만큼 많으니 여기에서 이를 모두 소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례를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사회의 장례에서 나타나는 유사한 속성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장례는 떠나보냄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만남이기도 하다. 고인의 과거와 남은 사람들의 현재가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조상신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고인이 남긴 흔적과 고인이 부재한 앞으로의 나날들이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장례는 죽음을 개인의 차원에서 사회의 차원으로 이전시킨다. 개인의 미래는 끝났다 할지라도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 그것이 장례가 하는 일 중 하나이다. 많은 사회의 장례에서 죽음을 죽음에 머물도록 하지 않고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새로운 세상에서의 태어남으로 설명하려는 문화적 장치들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인도네시아 토라자의 장례 과정에서 돌아가신 분을 ‘앉은 자세’로 고인돌에 모시는데 이는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의 자세와 유사한 것으로, 이 세상의 삶은 끝났지만 저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에서도 돌아가신 수도승을 장례할 때 앉은 자세로 관에 넣고 화장하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이다.
죽음과 삶, 삶과 죽음의 교차는 숫자로도 표현된다.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3과 7은 각각 삶과 죽음을 상징한다. 이마무라 쇼헤이(今村 昌平) 감독의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1983)는 시대를 알 수 없는 일본의 어느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영화이다. 이곳은 먹을 곳이 귀한 곳인데 70살이 되면 산 채로 나라야마라는 곳에 가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마을의 규약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이를 어길 수는 없다. 영화에서 70세가 된 어머니 오린을 맏아들인 다쓰헤이가 나라야마로 모셔야 하는 때가 되었을 때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 모자(母子)를 불러 놓고 나라야마에 가는 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라야마로 가는 길은 뒷산기슭을 돌아 세 번째 산을 지나면 연못이 하나 나온다. 연못을 세 번 돌아 계단을 오른다. 산을 하나 넘으면 깊은 계곡이 나온다. 그 계곡을 지나는 길에 일곱 번 도는데, 거기를 일곱 골짜기라 한다. 일곱 골짜기를 지나면 나라야마 길이 나온다. 길이 분명하게 보이진 않지만 계속 올라가다보면 신이 기다리고 계신다.” 여기에서 반복되는 숫자는 3과 7이다. 산 사람들의 공간인 마을에서 출발할 때는 3이라는 숫자가, 죽은자들의 공간인 나라야마에 가까이 갈수록 7이라는 숫자가 사용된다. 나라야마와 마을을 잇는 길은 산자와 죽은자가 공존하는, 혹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3과 7의 변주를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민간신앙에서 아이를 점지해주는 신은 삼신할매이고 수명을 관장하는 것은 칠성신이라는 설명 역시 이 숫자들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준다. 불교에서 49재는 7이 일곱 번 반복되는 것으로 그 이후에는 망자가 완전히 저세상으로 가는 것으로 의미화된다. (중동 지역은 40이라는 숫자가 성(聖)과 속(俗)의 전이기간을 상징한다고 한다.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한 것 역시 이런 상징적 의미 안에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은 3으로, 죽음은 7로 상징되지만 예외가 있다. 주호민의 웹툰 <신과 함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저승사자’는 세 명이 함께 다닌다. 동남아시아 몽족들의 장송곡에서 망자가 거쳐야 할 여정은 모두 (3의 배수인) 9개이고 지나가야 하는 문의 수는 모두 3개이다. 가는 길에 ‘돌을 먹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데 망자는 이 괴물을 제어하기 위해 괴물의 입에 3개의 실로 된 공을 던져야만 한다. 그래서 후손들은 망자를 위해 3개의 실타래 공을 준비한다. 죽음과 관련된 상황에서 7이라는 숫자대신 생명과 관련된 3이라는 숫자가 사용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끝나지만 저 세상에서의 삶이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환생이거나 영생이거나 윤회이거나 부활 등의 개념으로 제시된다.
죽음에 대한 문화적 관념들은 다르지만 죽음을 다루는 의례와, 이를 설명하는 문화적 태도들에서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죽은자에 대한 애도와 산자에 대한 위로가 바탕이 되고 의례를 통해 표현된다는 점이다. 15세기에 그려진 <세 명의 살아있는 자와 세 명의 죽은자>라는 그림에서 죽은자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현재 당신들의 모습이 과거 우리의 모습이었고, 현재 우리의 모습은 미래 당신들의 모습이지요”라고 말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 존재의 숙명이라면 죽음은 다른 누군가의 문제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다른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공감해야 할 가치를 갖는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날은 2015년 4월 16일이다. 정확하게 1년 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죽음을 갑자기 맞게 된 295명과 아직도 차가운 바다 속 어딘가에 있을 9명의 ‘억울한 죽음’은 여전히 설명되지 않았고 그들의 남은 가족들은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1년 전 그날이 365번 반복되는 날들을 지내고 있다.
공감에 기반한 죽음에 대한 예의. 2015년 4월 한국사회에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학자 마크 롤랜즈는 11년 동안 늑대와 함께 살았다. 보름달이 뜬 날 구슬프게 우는, 덩치가 산만 하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무장한, 번뜩이는 눈을 가진 바로 그 늑대 말이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소설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처럼 늑대소년으로 자랐다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개를 키워왔던 경험이 있던 그는 브레닌이라는 이름의 늑대를 새끼 때부터 키우기 시작해 11년 동안 함께 살았다. 그는 자신이 쓴 [철학자와 늑대](2012, 추수밭)라는 책을 통해 늑대와 함께 산 이야기와, 늑대가 죽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삶을 상대화한다. 늑대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을 바라보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며 인간의 삶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에 묶여 있는 존재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좇는 존재이다. 우리 삶의 의미와 삶의 끝은 시간의 선을 한참 따라 내려간 후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의 선은 우리를 매혹시키기도 하고 공포에 떨게도 한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고통이다.” (280쪽)
신을 제외한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삶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어떤 상태이다. 마크 롤랜즈가 쓴 것과 같이 삶이라는 시간의 선을 끝까지 따라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것이 죽음인데 그 선의 끝이 도대체 어디인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그 끝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선을 따라가는 여정은 어느 순간부터 두려운 길이 된다. 게다가, 그 끝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는 어떤 살아있는 인간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은 증폭된다. 미지의 것은 항상 두려운 법이니까.
셸리 케이건은 ‘죽음은 왜 나쁜가?’라는 질문에 대해 “죽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존재는 왜 나쁜 것인가?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있으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좋은 것들을 죽고 나면 하나도 누릴 수 없다.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했다([죽음이란 무엇인가], 서울: 엘도라도, 304쪽). 마크 롤랜즈 역시 “죽음은 우리로부터 미래를 박탈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고 했다. 미지의 상태이고 예측할 수 없고 삶의 여러 가능성을 빼앗는 죽음은 인간에게 두렵지만 피할 수는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죽음이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미지의 것, 설명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는 무엇일 뿐이라면 그것은 너무 두렵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고 그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낸 성긴 조합이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문화라 부른다면, 죽음과 같은 미지의 상태를 설명 가능한 영역으로 만드는 데에도 문화가 작동한다. 거의 대부분의 사회에서 죽음이라는 미지의 상태를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의미들을 부여하여 이해 가능한 영역으로 만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자신들의 문화적 체계 안에 포용하여 그 역시 살아갈만한 어떤 것으로 만드는 시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죽음을 다루는 문화적 태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중국, 라오스 등에 있는 몽족의 언어에서 태반을 가리키는 말은 ‘저고리’라는 뜻이다. 몽족 중 누군가가 죽으면 그 혼은 자기가 살아온 곳을 되짚어 올라가 저고리인 태반이 묻힌 곳까지 가서 그것을 입어야 한다. 태어날 때 입었던 옷을 다시 입어야만 혼이 길을 떠날 수 있다. 죽은 사람의 혼이 자기 저고리를 찾지 못하면, 그 혼은 영원히 벌거벗은 외톨이로 이승을 떠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면 태반을 잘 묻어야 한다. 몽족에게 죽음에 대한 준비는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티베트에서는 조장(鳥葬) 혹은 천장(天葬)이라 부르는 방식의 장례가 있다. 망자의 시신은 웅크린 자세로 흰 천에 싸고 포대에 넣어 장례 의례가 거행될 장소로 운반된다. 그곳에서 천장사들의 손에 들린 도끼와 칼, 망치 등으로 잘게 쪼개져 독수리, 까마귀 등에게 ‘보시’된다. 새가 깨끗하게 먹어야 영혼이 잘 환생한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토라자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을 앉은 자세로 고인돌에 모시고 몇 년 후에 장례를 치르기도 한다. 저승 가는 길에는 소의 영혼을 타고 가야 하는데 남은 가족들이 충분한 소를 모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망자의 영혼을 저승에 모실 충분한 소를 모으면 그제서야 장례를 행한다.
다양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을 다루는 다양한 문화적 태도들의 사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의 수만큼 많으니 여기에서 이를 모두 소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례를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사회의 장례에서 나타나는 유사한 속성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장례는 떠나보냄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만남이기도 하다. 고인의 과거와 남은 사람들의 현재가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조상신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고인이 남긴 흔적과 고인이 부재한 앞으로의 나날들이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장례는 죽음을 개인의 차원에서 사회의 차원으로 이전시킨다. 개인의 미래는 끝났다 할지라도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 그것이 장례가 하는 일 중 하나이다. 많은 사회의 장례에서 죽음을 죽음에 머물도록 하지 않고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새로운 세상에서의 태어남으로 설명하려는 문화적 장치들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인도네시아 토라자의 장례 과정에서 돌아가신 분을 ‘앉은 자세’로 고인돌에 모시는데 이는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의 자세와 유사한 것으로, 이 세상의 삶은 끝났지만 저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에서도 돌아가신 수도승을 장례할 때 앉은 자세로 관에 넣고 화장하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이다.
죽음과 삶, 삶과 죽음의 교차는 숫자로도 표현된다.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3과 7은 각각 삶과 죽음을 상징한다. 이마무라 쇼헤이(今村 昌平) 감독의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1983)는 시대를 알 수 없는 일본의 어느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영화이다. 이곳은 먹을 곳이 귀한 곳인데 70살이 되면 산 채로 나라야마라는 곳에 가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마을의 규약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이를 어길 수는 없다. 영화에서 70세가 된 어머니 오린을 맏아들인 다쓰헤이가 나라야마로 모셔야 하는 때가 되었을 때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 모자(母子)를 불러 놓고 나라야마에 가는 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라야마로 가는 길은 뒷산기슭을 돌아 세 번째 산을 지나면 연못이 하나 나온다. 연못을 세 번 돌아 계단을 오른다. 산을 하나 넘으면 깊은 계곡이 나온다. 그 계곡을 지나는 길에 일곱 번 도는데, 거기를 일곱 골짜기라 한다. 일곱 골짜기를 지나면 나라야마 길이 나온다. 길이 분명하게 보이진 않지만 계속 올라가다보면 신이 기다리고 계신다.” 여기에서 반복되는 숫자는 3과 7이다. 산 사람들의 공간인 마을에서 출발할 때는 3이라는 숫자가, 죽은자들의 공간인 나라야마에 가까이 갈수록 7이라는 숫자가 사용된다. 나라야마와 마을을 잇는 길은 산자와 죽은자가 공존하는, 혹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3과 7의 변주를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민간신앙에서 아이를 점지해주는 신은 삼신할매이고 수명을 관장하는 것은 칠성신이라는 설명 역시 이 숫자들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준다. 불교에서 49재는 7이 일곱 번 반복되는 것으로 그 이후에는 망자가 완전히 저세상으로 가는 것으로 의미화된다. (중동 지역은 40이라는 숫자가 성(聖)과 속(俗)의 전이기간을 상징한다고 한다.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한 것 역시 이런 상징적 의미 안에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은 3으로, 죽음은 7로 상징되지만 예외가 있다. 주호민의 웹툰 <신과 함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저승사자’는 세 명이 함께 다닌다. 동남아시아 몽족들의 장송곡에서 망자가 거쳐야 할 여정은 모두 (3의 배수인) 9개이고 지나가야 하는 문의 수는 모두 3개이다. 가는 길에 ‘돌을 먹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데 망자는 이 괴물을 제어하기 위해 괴물의 입에 3개의 실로 된 공을 던져야만 한다. 그래서 후손들은 망자를 위해 3개의 실타래 공을 준비한다. 죽음과 관련된 상황에서 7이라는 숫자대신 생명과 관련된 3이라는 숫자가 사용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끝나지만 저 세상에서의 삶이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환생이거나 영생이거나 윤회이거나 부활 등의 개념으로 제시된다.
죽음에 대한 문화적 관념들은 다르지만 죽음을 다루는 의례와, 이를 설명하는 문화적 태도들에서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죽은자에 대한 애도와 산자에 대한 위로가 바탕이 되고 의례를 통해 표현된다는 점이다. 15세기에 그려진 <세 명의 살아있는 자와 세 명의 죽은자>라는 그림에서 죽은자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현재 당신들의 모습이 과거 우리의 모습이었고, 현재 우리의 모습은 미래 당신들의 모습이지요”라고 말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 존재의 숙명이라면 죽음은 다른 누군가의 문제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다른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공감해야 할 가치를 갖는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날은 2015년 4월 16일이다. 정확하게 1년 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죽음을 갑자기 맞게 된 295명과 아직도 차가운 바다 속 어딘가에 있을 9명의 ‘억울한 죽음’은 여전히 설명되지 않았고 그들의 남은 가족들은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1년 전 그날이 365번 반복되는 날들을 지내고 있다.
공감에 기반한 죽음에 대한 예의. 2015년 4월 한국사회에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5년 4월 21일 화요일
감히, 문화를 말하다
(이 글은 한국 외방선교회 소식지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2015년 봄 호(통권 96호) "문화 이해하기"에 쓴 글입니다. 게재된 글은 한국외방선교회 홈페이지(http://www.kms75.or.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문화가 넘쳐난다, 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새로운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문화'라는 단어는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다. 백화점에도 '문화' 강좌가 있고 신문과 방송 등의 미디어에서도 '문화가 산책'이나 '문화면' 등의 이름을 걸고 소식을 전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문화가 있는 날'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공연이나 행사 입장료를 할인해 준다. '문화인은 질서를 지킵니다' 라는 문구도 예전에는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 영화나 예술공연을 보고 나오면 '문화생활 잘 했다'라거나 혹은 '가끔 문화생활을 하면 삶이 윤택해지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문화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걸로 봐서는 문화라는 용어에 썩 익숙한 것도 같은데 막상 문화란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대답하기 퍽 어려운 걸 보면 우리는 문화라는 용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문화라는 것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었던 영역이었을 수도 있겠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의미로 문화라는 용어를 정의해왔지만 이 시리즈를 통해 앞으로 이야기할 문화라는 용어는 글의 서두에서 들었던 사례들과 같이 예술이나 공연, 여가나 오락 활동 등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명확하게 정의하지는 못하겠지만 많은 인류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문화라는 용어를 '특정 사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넓은 의미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의 사례만 가지고 거칠게 이야기하면, 한국 사회에서 한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일본에서 아이누족이 자신들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 영국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식, 브라질의 한 빈민지역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들이 각각 다른 층위에 있기는 하지만 각각이 모두 특정한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화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살아가는 방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차원만을 문화라고 부른다면 그리 많은 정의가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문화는 단순히 관찰을 통해 알 수 있는, 외면적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그 사회의 맥락에서 적합하게 여겨지는 논리적인 질서를 만들어내는 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틀은 개인이 혼자 우긴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폭과 삶의 경험 속에서 그 사회의 성원들이 어느 정도 공통적으로 갖게 된 것이고 오랜 세월을 거쳐 수정되고 변형되면서 동시에 축적된 것이다.
특정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논리를 문화라는 틀을 통해 부여한다. 아프리카 Suri족 여성들의 치장은 다른 문화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보기에는 낯설고 이상하지만 그들 자신이 규정하는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시각화하고 설명하는 틀이 된다. 춘절, 그러니까 설날이 오기 전 중국 사람들이 터뜨리는 폭죽은 액을 막는 것이고 정월 초나흗날에 터뜨리는 폭죽은 재물신을 맞이하는 폭죽이다. 힌두 사람들에게 소는 신이 내린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동물이며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원칙에 입각해 처리한 식재료만을 먹기 때문에 그들이 먹지 않는 돼지고기와 같은 음식을 강요하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질서의 체계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자신의 책 <야생의 사고> 앞부분에서 러시아의 여러 부족들이 몸에 어떤 병이 있을 때 먹을 수 있는 약재를 소개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야쿠트족의 경우 치통이 있을 때에는 딱따구리 부리가 약재로 쓰인다고 한다. 여기에서 딱따구리 부리와 치통을 연관시키는 것은 그것이 실제 치료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딱따구리 부리와 인간의 이가 '서로 어울린다'고 보는 관점을 갖고 있느냐의 여부이다.
문화는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이며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몸에 익혀 살아가는 것인데 자연적 환경, 역사적 배경, 그 외의 여러 다른 요소들로 인해 각각의 사회는 다른 사회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각각의 사회에서 밥을 먹는 방식,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그렇지 못한 음식 등은 무척 상이하다. 유대인이나 무슬림들에게 돼지고기는 '불결한 음식'이며 중국에서 대부분의 식당에 다 있는 비둘기고기나 개구리는 현재의 한국에서는 거의 먹지 않는다. 어떤 사회에서 동물의 피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반면 다른 사회에서는 절대로 먹지 말아야 할 것으로 분류된다.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 닭요리를 주문하면 머리가 붙어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한 마리를 온전하게 요리했다는 의미이다. 또한 음식에 대해 느끼는 바 역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이 '맛있다'고 표현하는 떡볶이나 양념통닭 같은 음식들에 대해 중국의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맵다'고 반응하는 반면 쓰촨(四川)이나 후난(湖南) 같은 지역 사람들은 '싱겁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또한 쓰촨 사람들이 '맛있다'고 표현하는 음식을 한국 사람들이 먹으면 대개는 '맵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중국음식에 기름을 많이 쓰는 걸 보면 한국 사람들은 '느끼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반면 중국 사람들은 '고소하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내용과 형식도 상이하고 세상의 시작을 설명하는 신화도 각기 다르다. 옷을 입는 방식, 말하는 방식, 치장하는 방식,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등도 사회마다 문화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이런 '다름'으로 인해 각각의 문화에서 가치있게 여기는 대상이나 특성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몸에 대한 '평가'를 이야기할 수 있다. 모든 사회가 이상적인 체형과 체격에 대한 문화적 기준이 있다. 한국의 경우 여성들에 대해 마른 몸을 상대적으로 '예쁘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한 반면 니제르에서는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통통한' 몸이 이상적이고 예쁜 여성으로 여겨진다. 체중을 잴 때 가급적 몸무게가 많이 나오도록 옷을 겹겹으로 껴입고 재기도 하며 결혼을 앞둔 여성들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는 일을 만들지 않아 살이 찌도록 한다(더 자세한 내용은 <FAT: 비만과 집착의 인류학>이라는 책을 참고). 다른 예로는 브라질을 언급할 수 있다. 브라질의 여성들은 수영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영을 하면 상체가 발달하는데 이런 신체적 유형을 좋아하는 것은 북미나 북유럽 일부 국가들이다. 이와 달리 엉덩이가 좀 크고 살이 약간 쪄 통통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는 것이 브라질의 이상적인 여성상이다. 따라서 브라질 여성들은 수영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고 수영으로 다져진 미국식 몸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문화적 차이의 사례들은 수도 없이 많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사례들을 수도 없이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다양성과 상대성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모두 각자의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또한 어느 한쪽의 문화적 가치가 다른 것에 비해 우월하다는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로부터 벗어나 각각의 문화가 나름의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 즉 문화상대주의의 입장을 삶에 대한 이해의 기본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낯선 곳에 갔을 때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인정하려 하기보다는 나의 기준에 맞추어 그들을 재단하려 했던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문화상대주의의 입장에 서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무척 쉽지 않은 질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기는 하지만 막상 자신의 문화적 특징이 무엇인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누군가 물어온다면 대답하기 전에 한참을 머뭇거려야 하고 대답을 한다 해도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모두 만족할만한 대답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 친구가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나에게 '한국 문화의 특징은 뭐가 있어?'라고 묻는다면 그 순간에 대답할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 무척 당황하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 세계에 부여하는 질서의 체계를 문화라고 한다면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어떤 개념과 의미들로 질서잡힌 체계를 만드는가?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문화적 특징을 '빨리빨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恨 혹은 情이 한국의 문화적 특징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가족주의, 유교적 관념, 가부장적 태도, 빠른 경제성장을 통해 보여준 단결력 같은 것을 특징으로 드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한국전쟁에 이은 분단이나 일제에 의한 강압적 통치, 민주화 운동의 경력 등 역사적 혹은 정치적 경험 등을 한국 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2002년에 보여주었던 흥과 열정 역시 간혹 등장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어떤 개념도 만족스럽지 않다. 분명 이 개념들 모두 한국인들의 삶 속에 영향을 준 요소들인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한국인들의 일상과 삶을 말끔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의 일상과 생활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요소들인 한국어, 흰쌀밥, 김치, 비빔밥, 불고기, 불닭볶음면, (지금은 거의 입지 않지만 예전에는 거의 유일한 옷이었던) 한복과 같은 물질문화의 요소들은 어떤가? 한국인들이라면 이 요소들이 지금의 우리들, 혹은 우리들의 앞선 세대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요소들이 한국인의 삶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흰쌀밥을 한국인만 먹는 것도 아니고 비빔밥, 불고기, 불닭볶음면도 지구화 시대를 맞이하여 '독자적인 문화적 요소'라고 할 수 없다. 고유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입는 사람을 힘겹게 찾아야만 하는 한복을 한국 사람들의 공유된 문화적 요소라고 하기에도 쉽지 않다.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차이를 인정하며 그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화상대주의를 견지하자는 말은 출발부터 장벽에 부딪혔다. 나 자신의 문화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데 타인의 문화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이것이 바로 문화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문화는 공기와 같아서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문화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특정한 사회에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태어나 그 사회의 문화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배우며 살아가는 것. 살아갈 수는 있지만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이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Elen Langer는 문화에 대해 "아무런 의식적인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흘러가는 심리적인 상태"라 했다고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화를 살아가는 방식은 mindlessness(무심함)의 상태인 것이다. 문화는 머리로 알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때문에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문화의 특성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일을 아예 방기할 수는 없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류학자들이 포함된다. 인류학자들이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은, 다양한 문헌들의 수집과 분석도 포함하지만 연구하고자 하는 사회의 사람들과 함께 일정 기간 살아가는 참여관찰(participant observation)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모든 사회는 각각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내부에도 더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가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는 만큼 여러 모습들이 혼재되어 있다. 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떤 측면은 공유하지만 어떤 다른 측면은 공유하지 않기도 한다. 문화를 비유적으로 시각화해본다면 한 사회의 문화는 표면이 매끄럽고 경계가 명확한 플라스틱 상자가 여러 개 차곡차곡 쌓여 있는 모습이 아니라 여러 겹이 층층으로 겹쳐있고 부분부분 그 두께도 다른 양배추나 패스츄리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민족이나 나라에 동질적인 문화가 있다고 쉽게 생각하고 그것을 극단적으로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한다. 이런 입장은 변화나 내적 다양성, 갈등이나 억압, 착취 등은 잘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지배적인 가치와 관련이 없거나 모순되는 행위 및 제도들은 무시되거나 억압되고 '순수'하거나 일관된 문화의 모습만 그리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앞서 예로 들었던 것처럼 한국의 문화를 '恨'의 문화 혹은 '情'의 문화로만 보는 것,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철저한 국가주의에 입각해 살아간다고 믿는 것 등이 예가 될 것이다.
인간(人間)은 말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문화는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관찰, 말, 행위의 모방 등을 통해 학습한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고 그 사회에서 공유하는 방식의 의미화에 공감해야 한다. 이 사회가 돌아가는 이유는 서로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 특정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것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의미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믿음이 있어야 그 사회에서 모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저 상황에서는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이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저것에 대해서는 저렇게 해석하면서 그 사회의 사람들 대다수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누군가 특정 상황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점이 어느 정도 예측가능하다면 그와 나는 특정 문화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예측 가능성은 사회가 유지되는 일종의 믿음을 만들어낸다. 특정 사회에서의 문화라는 것은 그 믿음을 형성하는 일부이다. (어떤 믿음은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문화에 대한 논의는 어쩌면 믿음에 관한 논의일 수 있다. 사람들이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문화는 차이에 대한 이야기이자 특정한 사회의 맥락과 문화적 가치의 공유에 대한 이야기이며 소속감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도 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결국 살아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2014년 11월 9일 일요일
공포
공포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롤러코스터가 털털거리며 정점을 향해 올라갈 때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기다리는 상태가 공포이다. 저 골목의 어두운 모퉁이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상태, 내가 무심코 돌아봤을 때 어떤 눈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상태 등이 공포를 만든다. 인간의 삶에서 죽음 이후의 삶만큼 공포스러운 것은,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공포는 (귀신이든 좀비든 괴한이든 어떤 물체이든) 특정한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 무엇인가의 뒤에 숨어 있는 가정 혹은 가능성이다. 영화 <타이타닉>의 공포는 떠돌아다니는 빙산이 아니라 빙산의 뒤에 있었던, '부딪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13일의 금요일>이나 <나이트메어>의 공포는 제이슨이나 프레디가 아니라 그들 뒤에 도사리고 있는 '마주칠 수도 있고 마주칠 경우 빠져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혹은 가능성'이다. 내가 서 있는 곳에 싱크홀이 생길 수도 있다는 가정, 환풍구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가정, 배가 침몰할 수도 있다는 가정이 우리에게 공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큰 공포는 그런 가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때 닥쳐오는 바로 그 일이다.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무엇, 그럴 것이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는 상태. 이것은 더 큰 공포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포는, 예측 불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예측이 어긋난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공포는 신뢰가 깨지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동시에 신뢰가 무너져내리는 출발이기도 하다.
또한 공포는 (귀신이든 좀비든 괴한이든 어떤 물체이든) 특정한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 무엇인가의 뒤에 숨어 있는 가정 혹은 가능성이다. 영화 <타이타닉>의 공포는 떠돌아다니는 빙산이 아니라 빙산의 뒤에 있었던, '부딪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13일의 금요일>이나 <나이트메어>의 공포는 제이슨이나 프레디가 아니라 그들 뒤에 도사리고 있는 '마주칠 수도 있고 마주칠 경우 빠져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혹은 가능성'이다. 내가 서 있는 곳에 싱크홀이 생길 수도 있다는 가정, 환풍구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가정, 배가 침몰할 수도 있다는 가정이 우리에게 공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큰 공포는 그런 가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때 닥쳐오는 바로 그 일이다.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무엇, 그럴 것이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는 상태. 이것은 더 큰 공포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포는, 예측 불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예측이 어긋난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공포는 신뢰가 깨지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동시에 신뢰가 무너져내리는 출발이기도 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를 읽다가)
2014년 9월 14일 일요일
대중문화를 이야기하기
고대의 사람들, 심지어 인간 역사의 초기에도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고 전파했다. 동굴 벽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기고 뼈나 돌조각에 자신들의 기호와 언어로 기록하였으며 거친 종이 위에 잉크로 쓰고 활자로 찍어 냈다. 물론 입에서 입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전파되는 야한 이야기들, 전설, 노래 들은 조금씩 변형되기는 했을지라도 일을 하는 틈틈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다. 인간은 어떤 형태이든, 어떤 형식이든 어떤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전하며 살아왔다. 그 이야기 중 어떤 것은 유쾌하고, 어떤 것은 조롱을 하는 내용이었고, 어떤 것은 슬펐으며, 어떤 것은 무서움이라는 감정적 반응을 만들어 주었다. 그 이야기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을 때, 남들에게 전할만한 가치가 있을 때 그것은 말로, 기록으로, 형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어찌 보면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이야기이다. 영화는 2시간 정도에 걸쳐, 드라마는 16번에 걸쳐, 음악은 3-5분 정도의 시간에 걸쳐, 그리고 광고 사진은 한 컷의 사진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미자는 애절한 목소리로 육지를 그리워하는 흑산도 아가씨를 이야기하고(1절은 뭍을 그리워하는 흑산도 아가씨를, 2절은 섬으로 팔려온 ‘작부’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이 노래의 배경에 대해서는 http://goo.gl/cbPeQX 참고) 어떤 래퍼는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빠르게 뱉는다. 어떤 다큐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아마존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어떤 영화는, 실제로 올 것 같지 않은 미래사회 외계인의 위협과 공격을 이야기한다. 아주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고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들을 듣는다/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이야기’ 한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보았노라고. 당신도 경험해 보라고. 이 경험의 연쇄는 소위 ‘대중’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몇 개의 덩어리로 묶어 준다. 비슷한 경험이 주는 즐거움이 좋은 사람들은 그에 대해 더 알아보고 연구하기 위해 집단이 된다. (후에 이들은 매니아, 또는 팬과 같은 명칭을 얻게 된다.)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과 함께 결합되어 있는) 특정한 이야기는 대중적 경험이 되고 그것을 보고/듣고/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다시 섞여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미디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미디어의 역사와, 미디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별도로 논의되어야 한다.) 대중문화에 대한 정의와 관계없이, 우리가 대중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람들의 경험으로서의 이야기,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어떤 경험, 혹은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항상 즐거운 오락거리의 일종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가끔은 차라리 빨리 잊고 싶은 상처이거나 아픔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람의 이야기인 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들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역사 속에서 살아왔던 기록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이야기이다. 영화는 2시간 정도에 걸쳐, 드라마는 16번에 걸쳐, 음악은 3-5분 정도의 시간에 걸쳐, 그리고 광고 사진은 한 컷의 사진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미자는 애절한 목소리로 육지를 그리워하는 흑산도 아가씨를 이야기하고(1절은 뭍을 그리워하는 흑산도 아가씨를, 2절은 섬으로 팔려온 ‘작부’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이 노래의 배경에 대해서는 http://goo.gl/cbPeQX 참고) 어떤 래퍼는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빠르게 뱉는다. 어떤 다큐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아마존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어떤 영화는, 실제로 올 것 같지 않은 미래사회 외계인의 위협과 공격을 이야기한다. 아주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고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들을 듣는다/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이야기’ 한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보았노라고. 당신도 경험해 보라고. 이 경험의 연쇄는 소위 ‘대중’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몇 개의 덩어리로 묶어 준다. 비슷한 경험이 주는 즐거움이 좋은 사람들은 그에 대해 더 알아보고 연구하기 위해 집단이 된다. (후에 이들은 매니아, 또는 팬과 같은 명칭을 얻게 된다.)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과 함께 결합되어 있는) 특정한 이야기는 대중적 경험이 되고 그것을 보고/듣고/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다시 섞여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미디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미디어의 역사와, 미디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별도로 논의되어야 한다.) 대중문화에 대한 정의와 관계없이, 우리가 대중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람들의 경험으로서의 이야기,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어떤 경험, 혹은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항상 즐거운 오락거리의 일종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가끔은 차라리 빨리 잊고 싶은 상처이거나 아픔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람의 이야기인 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들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역사 속에서 살아왔던 기록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2014년 8월 10일 일요일
1이 0으로 바뀌는 순간, 죽음
11% > 45%
영화 <I, Robot>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
스푸너 형사는 사고로 차에 갇힌 채 다른 차와 함께 강물에 빠진다. 다른 차에는 소녀가 타고 있었다. 그들을 구하러 들어온 로봇 NS4는 소녀를 구하라는 스푸너 형사의 다급한 외침을 무시한 채 어린 소녀 대신 스푸너 형사를 강 위로 끌고 나온다. 왜 소녀 대신 자신을 구했는지 묻는 스푸너 형사에게 로봇 NS4는 "당신의 생존 가능성은 45%였지만 소녀의 생존 가능성은 11%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스푸너 형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논리적으로 내가 생존 가능성이 높았다 하더라도 그 소녀의 생존 가능성 11%는 그 부모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이라고.
이후 스푸너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비록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소녀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숫자로 환원된 생존 가능성이 누군가의 희망을 완전히 앗아가 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경험은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 다른 삶의 시작, 죽음...... 그런데
많은 사회에서 죽음은 삶과 연결되거나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문화적 설명 체계를 갖는다. 티벳에서는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이라 불리는 장례를 통해 죽은 자의 영혼이 새의 몸을 통해 다시 돌아온다고 하고 인도는 화장을 거친 후 영혼이 물을 통해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 몽족은 아이가 태어나면 태반을 땅에 묻는데 사람이 죽으면 태반이 묻힌 곳에 돌아와 그것을 저고리처럼 입고 저 세상으로 간다/다시 태어난다. 기독교에서는 아예 부활을 이야기한다.
종교학자 정진홍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생명이 없는 것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듯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것의 죽음도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는 것이라면 죽음은 그 죽음 주체가 실은 살아 있던 것임을 증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죽음은 ‘삶이 도달한 마지막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정진홍 2003 [만남, 죽음과의 만남], 서울: 궁리. 20쪽)
그러나 죽음이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저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으로 연결된다고 해서 그와 같은 문화적이면서 이론적인 설명이 죽음에 대한 슬픔을 경감할 수는 없다. 죽음을 마주한 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이런 문화적 어법이 설명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그저 어제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의 부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존재의 차원에서 죽음은 나쁘고 위험하고 슬프다.
셸리 케이건은 자신의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2012, 서울: 엘도라도)에서 죽음이 나쁜 이유는 “죽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존재는 왜 나쁜 것인가?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있으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좋은 것들을 죽고 나면 하나도 누릴 수 없다.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 했다. (304쪽) 물론 이 말은 살아 있으면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가정에 입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박탈당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에게 죽음은 슬픈 일이다.
함께 살았던 늑대의 삶과 죽음을 경험한 마크 롤랜즈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며 인간의 삶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에 묶여 있는 존재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좇는 존재이다. 우리 삶의 의미와 삶의 끝은 시간의 선을 한참 따라 내려간 후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의 선은 우리를 매혹시키기도 하고 공포에 떨게도 한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고통이다.” (마크 롤랜즈 2012 [철학자와 늑대], 서울: 추수밭. 280쪽) 결국 그의 이야기처럼 "죽음은 우리로부터 미래를 박탈"한다(271쪽).
삶을 한참 따라 내려가야 비로소 삶의 의미를 알게 되는데, 그것을 따라 가기도 전에,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죽음에 이르게 된 삶에 대해 아무렇게나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죽음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숫자로 치환되는 죽음
현대 사회가 되면서 죽음이 삶의 끝이고 미래의 박탈이며 결국은 상실이라는 사실로 이야기되기보다 그저 몇 자리의 숫자로 환원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책은 도시의 과도한 확장과 교외지역 개발, 속도 위주의 도로 정책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내용이고 교통사고에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서술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사람들의 죽음은 삶의 마지막 여정으로서 애도되는 것이 아니라 자료화되기 위한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다뤄진다. 죽음이 숫자가 되는 순간부터 그 죽음은 삶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데이터가 되어 사라진다.
죽음은 삶이 멈춘 시간인데 죽음이 죽음으로 이야기되지 않고 숫자로 환원되어 통계자료가 되는 순간 남은 가족들의 상실이라는 감정적 경험은 탈각된다.
교통사고 사망자가 9.11의 사망자보다 많다고 해서 9.11 사건을 별 것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교통사고나 9.11이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하루아침에 1이 0이 된 것이다. 사망자의 수가 많다고 해서 어떤 죽음을 교통사고와 비교하여 그리 대단한 것 아니니 호들갑떨지 말라고, 이제 그만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말은 그들의 죽음이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 여겨 공감하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존재 변화를 숫자(나아가 보상 따위의 경제적인 문제)로 바꿔치기하는 행위이다. 인권을 설명하면서 린 헌트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용어에서 따온 '상상된 공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린 헌트 2009 [인권의 발명], 파주: 돌베개. 39쪽) 죽음을 숫자로 치환하는 순간 이 공감 능력은 상실한 채 이성과 논리, 소위 말하는 '객관적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행위를 '설명'이라 믿게 된다. 숫자로 이루어진 소위 '객관적 데이터'를 들이대면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스푸너 형사를 물에서 건져낸 NS4의 헛된 설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상상된 공감의 부재
몇 달 전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이런 말을 썼었다:
세월호 사고로 인한 죽음도, 교통사고에 의한 죽음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아라. 자식을, 소중한 가족을 잃은 것은 그들과 가족들의 미래를 100% 상실한, 죽음만큼 아픈 경험이기 때문이다.
영화 <I, Robot>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
스푸너 형사는 사고로 차에 갇힌 채 다른 차와 함께 강물에 빠진다. 다른 차에는 소녀가 타고 있었다. 그들을 구하러 들어온 로봇 NS4는 소녀를 구하라는 스푸너 형사의 다급한 외침을 무시한 채 어린 소녀 대신 스푸너 형사를 강 위로 끌고 나온다. 왜 소녀 대신 자신을 구했는지 묻는 스푸너 형사에게 로봇 NS4는 "당신의 생존 가능성은 45%였지만 소녀의 생존 가능성은 11%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스푸너 형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논리적으로 내가 생존 가능성이 높았다 하더라도 그 소녀의 생존 가능성 11%는 그 부모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이라고.
이후 스푸너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비록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소녀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숫자로 환원된 생존 가능성이 누군가의 희망을 완전히 앗아가 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경험은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 다른 삶의 시작, 죽음...... 그런데
많은 사회에서 죽음은 삶과 연결되거나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문화적 설명 체계를 갖는다. 티벳에서는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이라 불리는 장례를 통해 죽은 자의 영혼이 새의 몸을 통해 다시 돌아온다고 하고 인도는 화장을 거친 후 영혼이 물을 통해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 몽족은 아이가 태어나면 태반을 땅에 묻는데 사람이 죽으면 태반이 묻힌 곳에 돌아와 그것을 저고리처럼 입고 저 세상으로 간다/다시 태어난다. 기독교에서는 아예 부활을 이야기한다.
종교학자 정진홍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생명이 없는 것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듯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것의 죽음도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는 것이라면 죽음은 그 죽음 주체가 실은 살아 있던 것임을 증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죽음은 ‘삶이 도달한 마지막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정진홍 2003 [만남, 죽음과의 만남], 서울: 궁리. 20쪽)
그러나 죽음이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저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으로 연결된다고 해서 그와 같은 문화적이면서 이론적인 설명이 죽음에 대한 슬픔을 경감할 수는 없다. 죽음을 마주한 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이런 문화적 어법이 설명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그저 어제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의 부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존재의 차원에서 죽음은 나쁘고 위험하고 슬프다.
셸리 케이건은 자신의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2012, 서울: 엘도라도)에서 죽음이 나쁜 이유는 “죽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존재는 왜 나쁜 것인가?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있으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좋은 것들을 죽고 나면 하나도 누릴 수 없다.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 했다. (304쪽) 물론 이 말은 살아 있으면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가정에 입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박탈당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에게 죽음은 슬픈 일이다.
함께 살았던 늑대의 삶과 죽음을 경험한 마크 롤랜즈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며 인간의 삶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에 묶여 있는 존재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좇는 존재이다. 우리 삶의 의미와 삶의 끝은 시간의 선을 한참 따라 내려간 후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의 선은 우리를 매혹시키기도 하고 공포에 떨게도 한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고통이다.” (마크 롤랜즈 2012 [철학자와 늑대], 서울: 추수밭. 280쪽) 결국 그의 이야기처럼 "죽음은 우리로부터 미래를 박탈"한다(271쪽).
삶을 한참 따라 내려가야 비로소 삶의 의미를 알게 되는데, 그것을 따라 가기도 전에,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죽음에 이르게 된 삶에 대해 아무렇게나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죽음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숫자로 치환되는 죽음
현대 사회가 되면서 죽음이 삶의 끝이고 미래의 박탈이며 결국은 상실이라는 사실로 이야기되기보다 그저 몇 자리의 숫자로 환원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도시 스프롤 현상 탓에 많은 미국인들이 과거보다 훨씬 자주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임에 따라, 미국의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4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미국의 연간 총기사고 사망자 수보다 1만 명이 많다. 2001년 9월 11일 테러로 죽은 미국인 수보다 10배 이상 많다. 비유하자면, 항공기가 추락해 모든 탑승객이 사망하는 사고가 3일마다 1번씩 계속 벌어지는 셈이다. 미국 고속도로에서 매년 이만큼의 사람이 죽는다. 전 세계적으로 10세부터 25세 사이 연령대의 최대 사망 원인은 교통사고다. (찰스 몽고메리 2014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 서울: 미디어윌. 156-157쪽)
위에서 인용한 책은 도시의 과도한 확장과 교외지역 개발, 속도 위주의 도로 정책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내용이고 교통사고에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서술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사람들의 죽음은 삶의 마지막 여정으로서 애도되는 것이 아니라 자료화되기 위한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다뤄진다. 죽음이 숫자가 되는 순간부터 그 죽음은 삶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데이터가 되어 사라진다.
죽음은 삶이 멈춘 시간인데 죽음이 죽음으로 이야기되지 않고 숫자로 환원되어 통계자료가 되는 순간 남은 가족들의 상실이라는 감정적 경험은 탈각된다.
교통사고 사망자가 9.11의 사망자보다 많다고 해서 9.11 사건을 별 것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교통사고나 9.11이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하루아침에 1이 0이 된 것이다. 사망자의 수가 많다고 해서 어떤 죽음을 교통사고와 비교하여 그리 대단한 것 아니니 호들갑떨지 말라고, 이제 그만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말은 그들의 죽음이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 여겨 공감하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존재 변화를 숫자(나아가 보상 따위의 경제적인 문제)로 바꿔치기하는 행위이다. 인권을 설명하면서 린 헌트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용어에서 따온 '상상된 공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린 헌트 2009 [인권의 발명], 파주: 돌베개. 39쪽) 죽음을 숫자로 치환하는 순간 이 공감 능력은 상실한 채 이성과 논리, 소위 말하는 '객관적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행위를 '설명'이라 믿게 된다. 숫자로 이루어진 소위 '객관적 데이터'를 들이대면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스푸너 형사를 물에서 건져낸 NS4의 헛된 설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상상된 공감의 부재
몇 달 전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이런 말을 썼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xx위 등 죽음이 숫자로 치환되는 한 그 죽음과 관련된 슬픔에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김ㅇㅇ 전 KBS 보도국장의 발언은 그렇기 때문에 더 섬뜩하다. '안전에 부주의한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이야기하고자 했다'는 '말은 2014년 4월 16일의 안타깝고 아까운 죽음들을 그저 숫자로만 치환하여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자신은 초연해 있다는, 그 죽음에 대한 애도와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자기고백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의 수많은 교통사고 희생자들까지 '아무 것도 아닌 죽음'으로 만들어버렸다."
세월호 사고로 인한 죽음도, 교통사고에 의한 죽음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아라. 자식을, 소중한 가족을 잃은 것은 그들과 가족들의 미래를 100% 상실한, 죽음만큼 아픈 경험이기 때문이다.
2014년 6월 29일 일요일
좀비와 귀신과 인간, 그들의 시간
얼마 전에 "좀비는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과거가 삭제된 존재'"라고 쓴 적이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좀비로 변화한 존재와의 조우는 그의 과거를 생각해 볼 여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좀비와 달리 그들의 과거 때문에 두려운 존재들이 있다. 귀신 혹은 유령이 그들이다. 좀비와, 귀신 혹은 유령의 대비는 어느 정도 명확하다. 좀비가 텅빈 육체의 존재들이라면 귀신 혹은 유령은 육체를 결여한 상태에 가깝다(육체를 결여하고 있으나 인간에게 시각적으로 보이기 위해 육체를 '임시로' 갖는 경우들이 많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좀비는 과거가 삭제된 존재라면 귀신/유령은 과거를 떠나지 못해 현재에 남은 존재들이다.
귀신이든 유령이든, 혹은 그들이 깃든 집이든 과거의 사건이 중요하다. 그 과거는 오노 후유미가 [잔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고 몇 년 전 혹은 며칠 전의 '사건'일 수도 있다.
귀신에게는 과거의 사건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그들은 과거가 현재까지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좀비를 과거가 삭제된 존재라 한다면 귀신은 현재가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좀비와 귀신에 대한 '대응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좀비에게는 현재적 처치(대개는 머리통을 박살내는 방식이겠지만)가 적합한 반면 귀신에게는 과거에 대한 해결만이 거의 유일한 치유가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론적으로 귀신의 문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힘으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이 더 안타까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일 수도 있다. 최소한 나에게는.
현재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 비단 귀신이나 유령에게만 필요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과거에 묶여 있는 귀신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더 간절히 필요하기에 인간은 공포문학과 영화를 통해 이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귀신과 유령은 그래서, 인간에 대한 강력한 은유이다.
(추기: 귀신들린 좀비가 있다면 정말 막강하겠는걸?)
현재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 비단 귀신이나 유령에게만 필요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과거에 묶여 있는 귀신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더 간절히 필요하기에 인간은 공포문학과 영화를 통해 이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귀신과 유령은 그래서, 인간에 대한 강력한 은유이다.
(추기: 귀신들린 좀비가 있다면 정말 막강하겠는걸?)
2014년 6월 6일 금요일
좀비와 역사
"군에서는 좀비들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지도 말고, 좀비가 되기 전에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쩌다 여기 오게 됐는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상상하려 들지 말라고 했죠. 나도 알아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요, 그렇죠? 이 좀비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궁금해지잖아요? 이건 마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는 것과 같잖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상상력이 발동하는건데. 그런데 바로 그때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대충 적당히 하면서 경계를 푸는 사이에 결국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면서 왜 이런 신세가 됐을까 궁금해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리죠. ..." (맥스 브룩스 2008 [세계대전 Z], 서울: 황금가지. 287쪽)
좀비는 인간이 마주치는 순간 뇌를 박살내 처치해야만 하는 대상일 뿐이다. 처치 후 숨 돌릴 틈이 있다면 좀비가 되기 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쩌다 좀비가 되었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뇌가 박살나버린 좀비 시체 앞에 서 있는 그 순간이라면 불가능한 가정이다. 피하거나 숨거나 도망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떻게 좀비가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은 같은 위험에 처했을 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빠져나갈 대안을 알려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와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바쁜 상황에서 남의 사정까지 돌볼 여유는 없다.
좀비는 그것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과거가 삭제된 존재'이다(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경석의 <좀비의 시간2>는 과거의 시간이 어떻게 현재의 좀비를 움직이게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모래인간의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경우도 인간인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사는 좀비들을 보여준다). 오로지 현재만 있는 존재. 누군가를 공격해서 그 살을 뜯어야만 자신이 생존할 수 있다는 현재적이고 즉시적인 존재가 바로 좀비이다. 애써 그들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정당성을 그와 마주한 상대에게 주고, 그들의 과거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는 것이 나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시도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좀비이다.
뒤집어서 다시 이야기해보자. 그렇다면, 좀비가 아닌 존재와 마주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생각하는 것은 필요하고 정당한 일이 된다.
그것이 우리가 좀비가 아닌 인간을 마주할 때 역사를 생각하는 이유이고 논리이다.
우리의 현재적 삶이, 인간의 현재 모습이 오랜 시간의 흐름과 깊이에 의해 형성된 결과이자 과정이라고 할 때 상대가 좀비가 아닌 이상 그 시간의 흐름을 돌이켜 생각할 여유 정도는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준비하고' 따위의 뻔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와 시간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을 대하는 도리의 한 측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것이 좀비가 아닌 인간을 대하는 예의라는 생각도 들어서이다.
누군가에게 있었던 아픔의 시간을 그저 지난 일이라고 쉽게 잊지는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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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oss-stitch ninja, flickr.com) |
좀비는 인간이 마주치는 순간 뇌를 박살내 처치해야만 하는 대상일 뿐이다. 처치 후 숨 돌릴 틈이 있다면 좀비가 되기 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쩌다 좀비가 되었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뇌가 박살나버린 좀비 시체 앞에 서 있는 그 순간이라면 불가능한 가정이다. 피하거나 숨거나 도망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떻게 좀비가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은 같은 위험에 처했을 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빠져나갈 대안을 알려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와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바쁜 상황에서 남의 사정까지 돌볼 여유는 없다.
좀비는 그것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과거가 삭제된 존재'이다(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경석의 <좀비의 시간2>는 과거의 시간이 어떻게 현재의 좀비를 움직이게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모래인간의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경우도 인간인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사는 좀비들을 보여준다). 오로지 현재만 있는 존재. 누군가를 공격해서 그 살을 뜯어야만 자신이 생존할 수 있다는 현재적이고 즉시적인 존재가 바로 좀비이다. 애써 그들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정당성을 그와 마주한 상대에게 주고, 그들의 과거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는 것이 나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시도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좀비이다.
뒤집어서 다시 이야기해보자. 그렇다면, 좀비가 아닌 존재와 마주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생각하는 것은 필요하고 정당한 일이 된다.
그것이 우리가 좀비가 아닌 인간을 마주할 때 역사를 생각하는 이유이고 논리이다.
우리의 현재적 삶이, 인간의 현재 모습이 오랜 시간의 흐름과 깊이에 의해 형성된 결과이자 과정이라고 할 때 상대가 좀비가 아닌 이상 그 시간의 흐름을 돌이켜 생각할 여유 정도는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준비하고' 따위의 뻔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와 시간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을 대하는 도리의 한 측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것이 좀비가 아닌 인간을 대하는 예의라는 생각도 들어서이다.
누군가에게 있었던 아픔의 시간을 그저 지난 일이라고 쉽게 잊지는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14년 3월 23일 일요일
인류학자로서의 씨스타
벌써 1년이 넘었다. 2013년 1월 중국에서 핸드폰을 소매치기 당해 허탈한 상태에서 돌아왔을 때 씨스타의 노래를 들었다.
"있다 없으니까 숨을 쉴 수 없어~"
이 노래의 맥락, 이 노래가 하고 싶던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이 "있다 없으니까"라는 부분을 들을 때마다, 그 며칠 전까지 내게 있었던 전화기가 생각났고, 약간 과장하면, 마음이 아렸다. (그 때 남긴 글은 여기에 있다)
며칠 전에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내용은 약간 수정하였다):
어제 모처럼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일찍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나름 오랜만의 일인 듯.
요즘 (여러 일) 때문에 거의 매일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갔는데 어제는 마눌님께서 나에게 '소유와 정기고의 <썸>이 딱 자기 노래'라고 말했다.
"요즘따라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이 페북 글에 달린 댓글 중에는 "남편에게 불러줘야 하는 노래"라는 한 선배의 푸념도 있었다. 내가 마눌님께 들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일게다. 다른 친구는 씨스타의 <나 혼자>를 인용하기도 했다(잠시 찾아보니 씨스타의 <나 혼자>는 자취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는 기사도 있었다.).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를 보고~"물론 특정 순간과 특정 맥락에서 "이건 딱 나의 노래"라고 여겨지는 노래가 비단 씨스타의 경우에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별의 순간에 우연히 듣게 된 어떤 노래는 나중에 들어도 여전히 마음의 상처를 덧나게 할 것이고 즐거운 순간에 우연히 듣게 된 어떤 노래가 그 상황에 딱 떨어지는 가사를 가졌다면 그 노래는 한 동안 '나의 노래'가 될 것이다.
내가 경험한 몇 상황에서는 우연히 씨스타의 노래들이 흘러나왔고 하필이면 그 상황에 딱 맞았던 것뿐이다.
누군가 나도 인식하지 못한 순간과 상황에 대해 아주 딱 맞는 이야기로 만들어준다면, 나에게 씨스타의 노래가 인상깊었던만큼의 깊은 인상을 갖게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삶 혹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묘사하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기, 메모,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리는 다양한 글들, 블로그 포스팅, (지금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는) 미니홈피..... 어떤 사람은 시나 소설을 통해, 우리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순간들의 축적과 중첩(우리는 이것을 삶이라고 부른다)을 인상적으로 재현하기도 한다.
어쩌면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삶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축적하고 묘사(description), 재현(representation)하는 사람들 중에 인류학자라는 분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가는 일상의 일부를 포착하여 서술하는 그들의 작업이 낳은 결과물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꽤 인상적인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중국 농촌에 사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페이샤오퉁의 어떤 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도 있고 한국의 어떤 젊은이는 [우리는 디씨}에서 자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움찔할 수도 있다. 아프리카의 어떤 분은 우연히 에반스 프리차드를 통해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낼지도 모르겠다. (인류학자의 역할이 단순히 재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일이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글도 쓰고 생각도 하고 바쁘게 지내는 것도 필요하고, 글을 읽고 생각을 짜내느라 바빠 다른 일들 돌볼 짬도 잘 나지는 않겠지만, 잠깐씩은 음악도 듣고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면서 지내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의 삶만큼이나 나와, 나의 가족들의 삶과 그 삶이 지나가고 있는 시간도 중요할테니.
이 글은 내가 내 돈 주고 산 레노버 T61, 내 돈 주고 산 아이락스 BT-6460 블루투스 키보드, 역시 내 돈 주고 산 (지금은 단종되어버린) 갤럭시탭 7.7 및 2013년에 잃어버린 핸드폰을 대신하고 있는 S*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아 작성된 것이다. 중국 어딘가에 있을, 나의 옛 전화기 대금을 나는 아직 내고 있다. (제품 후원 받아 글쓰시는 분들 흉내 좀 내봤다.)
누군가 나도 인식하지 못한 순간과 상황에 대해 아주 딱 맞는 이야기로 만들어준다면, 나에게 씨스타의 노래가 인상깊었던만큼의 깊은 인상을 갖게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삶 혹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묘사하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기, 메모,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리는 다양한 글들, 블로그 포스팅, (지금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는) 미니홈피..... 어떤 사람은 시나 소설을 통해, 우리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순간들의 축적과 중첩(우리는 이것을 삶이라고 부른다)을 인상적으로 재현하기도 한다.
어쩌면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삶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축적하고 묘사(description), 재현(representation)하는 사람들 중에 인류학자라는 분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가는 일상의 일부를 포착하여 서술하는 그들의 작업이 낳은 결과물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꽤 인상적인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중국 농촌에 사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페이샤오퉁의 어떤 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도 있고 한국의 어떤 젊은이는 [우리는 디씨}에서 자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움찔할 수도 있다. 아프리카의 어떤 분은 우연히 에반스 프리차드를 통해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낼지도 모르겠다. (인류학자의 역할이 단순히 재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일이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일상을 그려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것도 바쁘고 힘들고 숨찬데 그에 대해 반추하고 생각하면서 훨씬 많은 시간을 더 투자해 자신이, 혹은 다른 사람이 겪었던 가슴 깊이 파고드는 아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만큼의 기쁨과 행복, 혹은 그저 잠잠히 흘러가는 일상의 모습을 재현하고 표현하는 일이 어떻게 간단한 일일 수 있겠는가. 뛰어난 작사가, 작가, 글쓰는 사람들....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쉽지 않은 길에 서 있는, 인류학에 발을 걸치고 사는 분들께도 박수를 보낸다.
글도 쓰고 생각도 하고 바쁘게 지내는 것도 필요하고, 글을 읽고 생각을 짜내느라 바빠 다른 일들 돌볼 짬도 잘 나지는 않겠지만, 잠깐씩은 음악도 듣고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면서 지내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의 삶만큼이나 나와, 나의 가족들의 삶과 그 삶이 지나가고 있는 시간도 중요할테니.
(이 글의 제목을 다는 데 도움을 주신 클리포드 기어츠께 감사드린다.)
이 글은 내가 내 돈 주고 산 레노버 T61, 내 돈 주고 산 아이락스 BT-6460 블루투스 키보드, 역시 내 돈 주고 산 (지금은 단종되어버린) 갤럭시탭 7.7 및 2013년에 잃어버린 핸드폰을 대신하고 있는 S*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아 작성된 것이다. 중국 어딘가에 있을, 나의 옛 전화기 대금을 나는 아직 내고 있다. (제품 후원 받아 글쓰시는 분들 흉내 좀 내봤다.)
2013년 6월 24일 월요일
기억과 기계와 인간: 오영진의 <어덜트 파크>
코엑스에 갈 일이 있어 조금 일찍 가 서울 국제도서전에 들렀다. 가지고 있던 어떤 신용카드 덕에 공짜 입장권을 받아 3,000원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이런 공짜 입장은 행사장 안에서 경험한 엄청난 지름신의 강림을 조금이라도 위안하려는 주최측의 배려일 수도 있다. ㅠㅠ)
얼마 전 우연히 책 소개를 보고 다음 학기 <디지털시대의 문화인류학> 수업에 관련될 수 있겠다 싶어 제목을 저장해 놓은 책이 있었다.
오영진의 <어덜트 파크>(2013, 창비).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을 했고, 평소 만화를 잘 안 보는 사람이지만 이 정도의 분량이라면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도서전에서 창비 부스에 들렀다가 이 책을 발견. 보려고 했던 책인데 심지어 싸게 살 수 있다니!!
며칠 전 엄기호 선생님은 트위터에서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엄쌤의 설명 그대로다. 이 책은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장기매매라는, 무엇이든 팔고 살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비열한 얼굴도 그대로 보여주며 한국사회의 직장에서, 술집에서, 휴가를 위해 떠난 관광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까지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와 함께 내가 (다음 학기의 수업과 관련하여) 주목했던 것은 기억의 문제이다.
기억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몸이 해내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것이 항상 쉬운 것이 아니어서 오래 전부터 인간들은 기억을 위한 보조장치를 활용해왔다. 동물의 뼈나 돌판을 지나 종이를 거쳐 '디지털 시대'인 지금은 USB나 컴퓨터, 스마트폰 등이 인간의 몸 외부에 위치하며 그 역할을 담당한다.
몸으로부터 벗어나 외재하는 기억들. 그 기억을 담당하는 기계들. 그 기계/기억과 대면하는 인간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내가 예전에 엄청나게 좋아했던, VHS 비디오 테이프로 봤던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5)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오영진의 <어덜트 파크>는 <공각기동대>가 제기한 여러 주제 중 하나를 이어 받는다. 자본주의에서의 사람의 관계와 함께, 기억의 위치와, 기억의 장소인 인간/기계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가 될 것 같다. 그냥 읽어보시라.
얼마 전 우연히 책 소개를 보고 다음 학기 <디지털시대의 문화인류학> 수업에 관련될 수 있겠다 싶어 제목을 저장해 놓은 책이 있었다.
오영진의 <어덜트 파크>(2013, 창비).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을 했고, 평소 만화를 잘 안 보는 사람이지만 이 정도의 분량이라면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도서전에서 창비 부스에 들렀다가 이 책을 발견. 보려고 했던 책인데 심지어 싸게 살 수 있다니!!
며칠 전 엄기호 선생님은 트위터에서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엄쌤의 설명 그대로다. 이 책은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장기매매라는, 무엇이든 팔고 살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비열한 얼굴도 그대로 보여주며 한국사회의 직장에서, 술집에서, 휴가를 위해 떠난 관광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까지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와 함께 내가 (다음 학기의 수업과 관련하여) 주목했던 것은 기억의 문제이다.
기억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몸이 해내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것이 항상 쉬운 것이 아니어서 오래 전부터 인간들은 기억을 위한 보조장치를 활용해왔다. 동물의 뼈나 돌판을 지나 종이를 거쳐 '디지털 시대'인 지금은 USB나 컴퓨터, 스마트폰 등이 인간의 몸 외부에 위치하며 그 역할을 담당한다.
몸으로부터 벗어나 외재하는 기억들. 그 기억을 담당하는 기계들. 그 기계/기억과 대면하는 인간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내가 예전에 엄청나게 좋아했던, VHS 비디오 테이프로 봤던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5)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당신들(인간들)의 DNA 또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절점과 같은 것이다. 종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을 가지고 사람은 오직 기억으로 인해 개인일 수 있다. 설령 기억이 환상과 동의어라고 해도 인간은 기억에 의해 살아간다.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하게 했을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인형사의 말)
오영진의 <어덜트 파크>는 <공각기동대>가 제기한 여러 주제 중 하나를 이어 받는다. 자본주의에서의 사람의 관계와 함께, 기억의 위치와, 기억의 장소인 인간/기계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가 될 것 같다. 그냥 읽어보시라.
2013년 6월 15일 토요일
홍은택의 책 <중국만리장정> (2013, 파주: 문학동네)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책인데도 빨리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나는 책이다.
그래서, 서둘러 기록으로 남기기.
홍은택의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그의 미국 자전거 횡단기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2006, 한겨레출판)이었다. 출판되고 몇 년 후에 읽은 것이었는데 그 때는 내가 자전거에 완전 꽂혀 있을 때였다. 당시에는 자전거를 탈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았었고 자전거가 재미있었으며 친척들 몇 명이 우연히도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홍은택의 책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여행기였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자전거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구입했던 자전거 관련 책들은 이런 여행기뿐 아니라 도심에서 로드바이크를 탈 때 지켜야 할 것들을 적은 안내서, 자전거의 메카닉에 대한 책들도 포함된다.)
나는 자전거에 초점을 맞춰서 그의 책을 읽었지만 그 책은 자전거보다는 여행의 길목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을 읽고 나서 나 역시 그가 따라 간 Trans American Trail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길을 혼자 가면 힘들테니 누군가를 꼬셔서 함께 가되 그가 운전하는 지원차량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렇게 뼈속까지 연도남이다.)
한참을 지나, 홍은택이 중국 자전거 여행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중국 자전거 여행에 대한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고 현대 중국 젊은이들이 워낙 많이 다녀서 웨이보나 중국 블로그, 각종 포털에서도 각종 여행기는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야기를 전달할 줄 아는 홍은택의 책이다. 게다가 심지어 중국이라니. 이번에는 자전거가 아니라 중국이기 때문에 손에 들게 되었다. 주문완료 확인버튼을 클릭하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그의 시선을 따라 중국을 여행하는 기분에 들떠 있었다.
이 책만 놓고 보면 홍은택을 한국의 피터 헤슬러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피터 헤슬러의 <리버타운: 양쯔강에서 보낸 2년> (2003, 눌와)과 <컨트리 드라이빙: 자동차로 달린 7000마일 중국여행기> (2012, 중앙북스), 그리고 한국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Oracle Bones 같은 책들은 인류학자가 쓰지 않은 가장 인류학적인 책에 포함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문화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중국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주한 경험들을 솔직하면서도 위트있게, 그러나 사람에 대한 존중도 놓치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피터 헤슬러의 책은 중국에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한 번 정도 읽어볼만한 저작이다. 홍은택의 이 책 역시 자전거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마주한 경험들을 솔직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꼭 중국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읽어보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재미는 일단 홍은택의 유머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본문도 본문이지만 각 장에 붙인 소제목들은 제목만으로도 즐겁다. (만약 이 상태를 문자로 표현한다면 ㅋㅋㅋㅋ 정도 될 것이다.)
3장 아무도 양보하지 않을 거라는 예측 가능성
5장 여행은 로(路)를 잃어도 도(道)를 얻는 과정
11장 프랜차이즈화되는 중국
39장 권력자는 당대를, 시인은 천 년을 사는구나
등등.
저자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중국이라는 과목을 학습하러 떠난 여행의 결과이다. 물론 그의 여행은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과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자전거가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떠날 것을 아직도 기대하고 있다. 그의 가족들은 반대할지도 모르겠지만.
학술적이지는 않더라도 사람의 눈으로, 사람의 속도로 중국을 바라보는 그 시선을 따라가는 동안 솔직한 중국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저자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팬이 되었다.
그래서, 서둘러 기록으로 남기기.
홍은택의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그의 미국 자전거 횡단기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2006, 한겨레출판)이었다. 출판되고 몇 년 후에 읽은 것이었는데 그 때는 내가 자전거에 완전 꽂혀 있을 때였다. 당시에는 자전거를 탈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았었고 자전거가 재미있었으며 친척들 몇 명이 우연히도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홍은택의 책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여행기였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자전거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구입했던 자전거 관련 책들은 이런 여행기뿐 아니라 도심에서 로드바이크를 탈 때 지켜야 할 것들을 적은 안내서, 자전거의 메카닉에 대한 책들도 포함된다.)
나는 자전거에 초점을 맞춰서 그의 책을 읽었지만 그 책은 자전거보다는 여행의 길목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을 읽고 나서 나 역시 그가 따라 간 Trans American Trail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길을 혼자 가면 힘들테니 누군가를 꼬셔서 함께 가되 그가 운전하는 지원차량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렇게 뼈속까지 연도남이다.)
한참을 지나, 홍은택이 중국 자전거 여행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중국 자전거 여행에 대한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고 현대 중국 젊은이들이 워낙 많이 다녀서 웨이보나 중국 블로그, 각종 포털에서도 각종 여행기는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야기를 전달할 줄 아는 홍은택의 책이다. 게다가 심지어 중국이라니. 이번에는 자전거가 아니라 중국이기 때문에 손에 들게 되었다. 주문완료 확인버튼을 클릭하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그의 시선을 따라 중국을 여행하는 기분에 들떠 있었다.
이 책만 놓고 보면 홍은택을 한국의 피터 헤슬러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피터 헤슬러의 <리버타운: 양쯔강에서 보낸 2년> (2003, 눌와)과 <컨트리 드라이빙: 자동차로 달린 7000마일 중국여행기> (2012, 중앙북스), 그리고 한국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Oracle Bones 같은 책들은 인류학자가 쓰지 않은 가장 인류학적인 책에 포함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문화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중국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주한 경험들을 솔직하면서도 위트있게, 그러나 사람에 대한 존중도 놓치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피터 헤슬러의 책은 중국에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한 번 정도 읽어볼만한 저작이다. 홍은택의 이 책 역시 자전거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마주한 경험들을 솔직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꼭 중국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읽어보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재미는 일단 홍은택의 유머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상하이에서 교통법규가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가장 피해보는 사람도 보행자다. 그들에게 길의 권리는 없다. 도시라는 정글에서 사자나 호랑이는 화물차나 버스 같은 대형차들이다. 그리고 관리들이 많이 타는 아우디 검정 승용차, 그들은 경적의 데시벨로 권력을 표시한다. 유리창이라는 방음벽이 없이 차도로 다니는 자전거에는 바로 귀에 대해 경적을 울리는 것 같다. 상하이에서 경적은 꼭 필요할 때 울리는 장치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운전자들이 경적을 누르지 않을 때야말로 위험한 상황이다. 졸고 있거나 동승자와 수다를 떨다가 한눈을 팔아서 미처 경적을 누를 때를 놓친 경우이기 때문이다. (35-36)
본문도 본문이지만 각 장에 붙인 소제목들은 제목만으로도 즐겁다. (만약 이 상태를 문자로 표현한다면 ㅋㅋㅋㅋ 정도 될 것이다.)
3장 아무도 양보하지 않을 거라는 예측 가능성
5장 여행은 로(路)를 잃어도 도(道)를 얻는 과정
11장 프랜차이즈화되는 중국
39장 권력자는 당대를, 시인은 천 년을 사는구나
등등.
저자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중국이라는 과목을 학습하러 떠난 여행의 결과이다. 물론 그의 여행은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과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자전거가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떠날 것을 아직도 기대하고 있다. 그의 가족들은 반대할지도 모르겠지만.
학술적이지는 않더라도 사람의 눈으로, 사람의 속도로 중국을 바라보는 그 시선을 따라가는 동안 솔직한 중국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저자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팬이 되었다.
2013년 4월 25일 목요일
타협과 어정쩡함이 만들어내는 꿈: 인류학
인류학은 특정 사회의 문화와 그곳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하면서도 거리를 두라고 하는 모순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학문이다. 그것이 쉽게 가능한 것은 분명 아니고, 실제로는 정말 가능한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 모호함 속에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인류학이라는 우산 아래에 들어와 있는 것은, 그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거나 그 모순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순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책에서 얻지 못하는 배움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당신들의 문화적 특성을 내가 설명해 줄께!!”라는 허세나 오만도 아니고 “나는 당신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니 백지와 같은 나를 가르쳐 주세요”라는 극단의 굽신거림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서있는 어정쩡한 상황이 차라리 만족스러운 상태. 어정쩡함이 차라리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방패막이 레이블'이 어쩌면 인류학이 아닐까. 그리고 어정쩡한 어떤 자리의 인류학자가 현장의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내는 '타협의 산물'이 인류학의 연구결과가 될 것이다. 좀 과하게 표현하여, 공감과 거리두기의 내재된 모순을 화해적 관계로 가장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인류학 방법론이 숨겨놓은 전략적 목표라고 한다면 실제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는 것은 결국 어정쩡한 어딘가에 만족해야 한다는 체념적 사실의 내재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책과 글이 제공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는 믿음이 목표와 실제 사이의 간극을 메워준다. 이 과정에서 전략적 목표는 전복되고 사람으로부터 배운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실을 체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제서야!!
이 배움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고 시스템을 보여주고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는 이상이 인류학에 있다. 인류학은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세한 모습을 잘 그려내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회적 현상으로 다룸으로써 그것이 위치하고 있는 맥락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의미와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변화까지 분석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수술실에서 권력을 이야기하고 부엌과 들판에서 여성과 남성과 가족과 제도를 이야기하고 몸을 통해 시선을 이야기하는/이야기하려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저 언덕 너머에 내가 닿아야 할 무지개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그곳에 가려는 각오와 포부가 인류학자들의 연구계획서에서 꿈틀댄다.
어쩌지 못하는 어정쩡함이 만들어내는 소박함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이 그리 소박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원대한 꿈. 그것이 인류학자들이 꾸는 꿈이다.
“당신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당신들의 문화적 특성을 내가 설명해 줄께!!”라는 허세나 오만도 아니고 “나는 당신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니 백지와 같은 나를 가르쳐 주세요”라는 극단의 굽신거림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서있는 어정쩡한 상황이 차라리 만족스러운 상태. 어정쩡함이 차라리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방패막이 레이블'이 어쩌면 인류학이 아닐까. 그리고 어정쩡한 어떤 자리의 인류학자가 현장의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내는 '타협의 산물'이 인류학의 연구결과가 될 것이다. 좀 과하게 표현하여, 공감과 거리두기의 내재된 모순을 화해적 관계로 가장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인류학 방법론이 숨겨놓은 전략적 목표라고 한다면 실제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는 것은 결국 어정쩡한 어딘가에 만족해야 한다는 체념적 사실의 내재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책과 글이 제공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는 믿음이 목표와 실제 사이의 간극을 메워준다. 이 과정에서 전략적 목표는 전복되고 사람으로부터 배운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실을 체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제서야!!
이 배움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고 시스템을 보여주고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는 이상이 인류학에 있다. 인류학은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세한 모습을 잘 그려내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회적 현상으로 다룸으로써 그것이 위치하고 있는 맥락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의미와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변화까지 분석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수술실에서 권력을 이야기하고 부엌과 들판에서 여성과 남성과 가족과 제도를 이야기하고 몸을 통해 시선을 이야기하는/이야기하려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저 언덕 너머에 내가 닿아야 할 무지개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그곳에 가려는 각오와 포부가 인류학자들의 연구계획서에서 꿈틀댄다.
어쩌지 못하는 어정쩡함이 만들어내는 소박함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이 그리 소박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원대한 꿈. 그것이 인류학자들이 꾸는 꿈이다.
2012년 9월 7일 금요일
인류학의 연구과정과 다큐멘터리
꽤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인류학의 연구과정과 다큐멘터리 작업 과정의 일부가 상당히 닮았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아침 신문의 한 꼭지를 보면서 '그렇지, 이런 점에서 이 두 가지의 작업은 유사한 점이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현장에서의 연구를 끝낸 후 그것을 에스노그라피라는 이름으로 기록하는 과정은 더욱 그렇다.
한겨레(2012년 9월 7일) 김형준의 다큐 세상 "수감생활 다름없는 편집실의 '세 가지 격언'" (기사보기)
이 칼럼에서는 다큐멘터리 편집실에서 통용되는 '세 가지 격언'을 제시하고 있다.
1) 개떡같이 찍어도 찰떡같이 붙이면 된다.
2) 모든 답은 원본 속에 있다.
3) 편집은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만두는 것이다.
인류학의 연구는, 다른 사람들의 삶의 흐름 속에 불편을 끼치면서 들어가 그 흐름에 몸을 실었다가 빠져나와 그 경험을 연구자 자신이 속한 사회의 언어와 문화적 태도에 적합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제시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경험적으로 파악한 정보와 수집한 자료들을 통해 자신이 연구한 사회를, 완벽하지는 않은 모습이라 할지라도 삶의 일부분을 '공감'의 태도로 접근하고, 솔직함의 심정으로 기록/기술/분석하는 에스노그라피로 완성하는 것, 이것이 인류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주기'가 될 것이다.
현장에서의 현장연구 과정은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뭐 특별한 것이 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현장연구의 과정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 급작스럽게 결정해야 할 사항들과의 싸움, 연구에 몰입하려는 마음가짐을 방해하는 복잡하고 귀찮고 까다로운 행정적 절차들로 점철된다. 현장연구 이전에 썼던 계획서의 "연구과정 및 월별 계획" 따위는 이미 쓸모없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저 그들의 삶이, 그들과 연구자 자신의 관계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 뿐.
이런 숨가쁜 현장연구를 끝내고 돌아오면 잔뜩 쌓인 자료들, 기록들, 그 당시에는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라 찍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진들 더미 속에 멍한 눈과, 막막함과 조급함으로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패닉 상태의 무표정함으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휴우~)
휴식 혹은 '시차 적응과 마음의 정리' 같은 핑계로 무마된 자신의 사회에서의 재적응기간을 얼마간 지낸 후(사실 그것은 꽤 긴 시간이 되기 일쑤지만) 이제 이런 자료의 무더기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흐름을 솔직한 태도로 만들어 낼 때가 되었다. 다큐 작가가 편집실에 틀어박혀 원본 필름들을 편집하는 것처럼 인류학자는 자신의 현장연구 과정의 개떡같은 기록을 어떻게든 찰떡으로 만들어 에스노그라피를 완성해야 한다. 쉽지 않은 과정이고, 그 결과물은 떡집에서 예쁘게 포장되어 나온 것과는 전혀 다르게 균형도 잡히지 않고 울퉁불퉁하며 떡고물도 균일하게 묻은 상태는 아닐테지만, 그래도 나만의 찰떡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어찌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들은 현장연구의 자료들이다. (선행연구 검토와 같은 기본적인 것은 여기서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인류학적 현장연구랍시고 상하이에 간 것이 정확하게 10년 전인데 1년 반 정도의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몇 선배들이 나에게 열심히 했던 말은 "참여관찰일지를 반복해서 보라"는 것이었다. 그 안에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들어있다고. 다큐 작가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찍어온 원본 필름들을 통해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하는 것처럼 인류학자는 자신의 참여관찰일지와 자료의 무더기를 통해 '그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한다. 그것이 인류학자들의 숙명이다!!
그 숙명을 받아들이고 나면 이제 끝내는 일이 남는다. 현장연구의 과정도 그렇고 에스노그라피의 작성 과정도 그렇고 어떠한 경우라도 만족스럽게 끝낼 수는 없다. 그 과정은 그냥 놔두면 평생토록 흘러갈 수도 있는 흐름이다. 조사의 과정과 에스노그라피 작성에서 모두가 동의할만한 '끝이라는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연구자 자신이 '아,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결정하고 빠져나오는 그때 비로소 끝날 뿐이다. (물론 논문이나 결과물 제출 시한, 제한된 연구비, 심각하게 고갈된 체력과 그것을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나이 등이 그 결심을 도와주기는 한다. 아아.... 마감 인생이여.)
다큐를 만드는 일이건 인류학적 연구와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이건 쉬운 것은 없다. 하긴, 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 식은 죽 먹기도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라는 것, 해 보면 안다. 식어서 굳고 말라 떡져버린 죽을 먹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다. 천막 안에서 숨죽이며 며칠이고 몇 주고 기다리는 자연 다큐멘터리 작가가 드디어 원하는 장면 한 컷을 얻어내 편집실로 달려올 때의 기쁨, 그 기쁨이라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그들은 그렇게 카메라와 장비를 챙긴다. 희망이 절망이나 실망이 될 때도 많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희망은 희망인 것이다.
편집실에 갇힌 다큐 작가들과, 현장연구 때문에 맘졸이고 부담스러워하는 주변의 인류학자들(그리고 내가 아끼는 '학생 인류학자들') 모두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라는 푸념도..... 이해한다. 쿨럭)
아침 신문의 한 꼭지를 보면서 '그렇지, 이런 점에서 이 두 가지의 작업은 유사한 점이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현장에서의 연구를 끝낸 후 그것을 에스노그라피라는 이름으로 기록하는 과정은 더욱 그렇다.
한겨레(2012년 9월 7일) 김형준의 다큐 세상 "수감생활 다름없는 편집실의 '세 가지 격언'" (기사보기)
이 칼럼에서는 다큐멘터리 편집실에서 통용되는 '세 가지 격언'을 제시하고 있다.
1) 개떡같이 찍어도 찰떡같이 붙이면 된다.
2) 모든 답은 원본 속에 있다.
3) 편집은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만두는 것이다.
인류학의 연구는, 다른 사람들의 삶의 흐름 속에 불편을 끼치면서 들어가 그 흐름에 몸을 실었다가 빠져나와 그 경험을 연구자 자신이 속한 사회의 언어와 문화적 태도에 적합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제시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경험적으로 파악한 정보와 수집한 자료들을 통해 자신이 연구한 사회를, 완벽하지는 않은 모습이라 할지라도 삶의 일부분을 '공감'의 태도로 접근하고, 솔직함의 심정으로 기록/기술/분석하는 에스노그라피로 완성하는 것, 이것이 인류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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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상하이, 영화촬영 모습 |
현장에서의 현장연구 과정은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뭐 특별한 것이 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현장연구의 과정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 급작스럽게 결정해야 할 사항들과의 싸움, 연구에 몰입하려는 마음가짐을 방해하는 복잡하고 귀찮고 까다로운 행정적 절차들로 점철된다. 현장연구 이전에 썼던 계획서의 "연구과정 및 월별 계획" 따위는 이미 쓸모없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저 그들의 삶이, 그들과 연구자 자신의 관계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 뿐.
이런 숨가쁜 현장연구를 끝내고 돌아오면 잔뜩 쌓인 자료들, 기록들, 그 당시에는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라 찍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진들 더미 속에 멍한 눈과, 막막함과 조급함으로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패닉 상태의 무표정함으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휴우~)
휴식 혹은 '시차 적응과 마음의 정리' 같은 핑계로 무마된 자신의 사회에서의 재적응기간을 얼마간 지낸 후(사실 그것은 꽤 긴 시간이 되기 일쑤지만) 이제 이런 자료의 무더기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흐름을 솔직한 태도로 만들어 낼 때가 되었다. 다큐 작가가 편집실에 틀어박혀 원본 필름들을 편집하는 것처럼 인류학자는 자신의 현장연구 과정의 개떡같은 기록을 어떻게든 찰떡으로 만들어 에스노그라피를 완성해야 한다. 쉽지 않은 과정이고, 그 결과물은 떡집에서 예쁘게 포장되어 나온 것과는 전혀 다르게 균형도 잡히지 않고 울퉁불퉁하며 떡고물도 균일하게 묻은 상태는 아닐테지만, 그래도 나만의 찰떡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어찌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들은 현장연구의 자료들이다. (선행연구 검토와 같은 기본적인 것은 여기서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인류학적 현장연구랍시고 상하이에 간 것이 정확하게 10년 전인데 1년 반 정도의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몇 선배들이 나에게 열심히 했던 말은 "참여관찰일지를 반복해서 보라"는 것이었다. 그 안에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들어있다고. 다큐 작가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찍어온 원본 필름들을 통해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하는 것처럼 인류학자는 자신의 참여관찰일지와 자료의 무더기를 통해 '그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한다. 그것이 인류학자들의 숙명이다!!
그 숙명을 받아들이고 나면 이제 끝내는 일이 남는다. 현장연구의 과정도 그렇고 에스노그라피의 작성 과정도 그렇고 어떠한 경우라도 만족스럽게 끝낼 수는 없다. 그 과정은 그냥 놔두면 평생토록 흘러갈 수도 있는 흐름이다. 조사의 과정과 에스노그라피 작성에서 모두가 동의할만한 '끝이라는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연구자 자신이 '아,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결정하고 빠져나오는 그때 비로소 끝날 뿐이다. (물론 논문이나 결과물 제출 시한, 제한된 연구비, 심각하게 고갈된 체력과 그것을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나이 등이 그 결심을 도와주기는 한다. 아아.... 마감 인생이여.)
다큐를 만드는 일이건 인류학적 연구와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이건 쉬운 것은 없다. 하긴, 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 식은 죽 먹기도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라는 것, 해 보면 안다. 식어서 굳고 말라 떡져버린 죽을 먹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다. 천막 안에서 숨죽이며 며칠이고 몇 주고 기다리는 자연 다큐멘터리 작가가 드디어 원하는 장면 한 컷을 얻어내 편집실로 달려올 때의 기쁨, 그 기쁨이라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그들은 그렇게 카메라와 장비를 챙긴다. 희망이 절망이나 실망이 될 때도 많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희망은 희망인 것이다.
편집실에 갇힌 다큐 작가들과, 현장연구 때문에 맘졸이고 부담스러워하는 주변의 인류학자들(그리고 내가 아끼는 '학생 인류학자들') 모두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라는 푸념도..... 이해한다. 쿨럭)
2012년 2월 2일 목요일
마케팅과 인류학 - 고민중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다음 학기 수업을 앞두고 혹시 참고할만한 책이 있을까 해서 마케팅 관련 책들이 모여있는 섹션을 스윽 훑어 보았다.
마케팅 관련 책들은 차이와 차별을 강조하고 다른 누구보다 먼저 남들이 찾지 못한 블루오션을 발견하고 그것을 나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초일류' '살아남는 법'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차별화 전략' '경쟁'... 이런 단어들이 마케팅 관련 책들의 제목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레이싱 코스에 선 선수들처럼.
반면 인류학은, 차이와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이해하고 어떤 형태라도 차별은 철폐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경쟁하여 누군가를 제치고 내가 그 자리에 '혼자' 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서서 같은 시선에서 바라보자고 이야기한다.
하나는 다른 누군가가 따라오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하나는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는 그 지점에서부터 인간으로서의 발전이 시작된다고 이야기한다.
마케팅은 사악하고 인류학은 착한 학문이라고, 어린 아이들의 동화에나 나올법한 이분법으로 생각하자는 것 아니다. 다만 이 두 입장을 (인류학적으로) 화해시키고 (경영학적인 입장에서) 실용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마케팅과 문화인류학'이라는 작업일텐데 두 개의 접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최소한 나는)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수업을 통해 이 두 입장의 접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양한 자료들에 근거해 두 입장의 차이를 '제대로' 보여줄 수만 있어도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용적인 차원의 지식들과 함께 학문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함께 이루어지는 수업이어야 가능한 일이겠지.
어렵다.
(중국과 관련하여 포스팅할 이야기가 지난 11월부터 몇 개 쌓여 있는데 그것은 아직 손도 못 대고 이런 잡생각이나 남겨 놓다니. 오죽 답답하면..... ㅉㅉㅉ)
마케팅 관련 책들은 차이와 차별을 강조하고 다른 누구보다 먼저 남들이 찾지 못한 블루오션을 발견하고 그것을 나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초일류' '살아남는 법'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차별화 전략' '경쟁'... 이런 단어들이 마케팅 관련 책들의 제목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레이싱 코스에 선 선수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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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velo_city (from flickr.com) |
하나는 다른 누군가가 따라오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하나는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는 그 지점에서부터 인간으로서의 발전이 시작된다고 이야기한다.
마케팅은 사악하고 인류학은 착한 학문이라고, 어린 아이들의 동화에나 나올법한 이분법으로 생각하자는 것 아니다. 다만 이 두 입장을 (인류학적으로) 화해시키고 (경영학적인 입장에서) 실용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마케팅과 문화인류학'이라는 작업일텐데 두 개의 접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최소한 나는)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수업을 통해 이 두 입장의 접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양한 자료들에 근거해 두 입장의 차이를 '제대로' 보여줄 수만 있어도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용적인 차원의 지식들과 함께 학문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함께 이루어지는 수업이어야 가능한 일이겠지.
어렵다.
(중국과 관련하여 포스팅할 이야기가 지난 11월부터 몇 개 쌓여 있는데 그것은 아직 손도 못 대고 이런 잡생각이나 남겨 놓다니. 오죽 답답하면..... ㅉㅉㅉ)
공정과 믿음
아침에 신문을 읽다가 민주통합당 강철규 공천심사위원장의 이야기를 보았다. 공정함을 강조하면서, 예전에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사용하던 비유가 있다고 했다. "케이크를 두 사람이 어떻게 공정하게 나눌건가. 한 사람이 먼저 칼로 자르도록 한 뒤, 나머지 한 사람이 둘 중에서 선택하게 한다." 그가 보는 공정은, 참으로 공정하다.
문득, 사람 사는 세상에 공정함은 참 필요한 일이지만 그 공정함은 그저 원칙과 계약이 강조되는 업무적 관계 속에서나 적합할 것 같은 차가움이 묻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크를 둘로 나누지 않고 함께 마주 앉아 퍼먹으면서 내가 덜 먹든 상대가 많이 먹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인간 관계일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좀 덜 먹고 더 먹고 상관하지 않고 큰 불만도 갖지 않는 모습. 이번엔 네가 케이크를 많이 먹었으니 다음에는 크림 올린 맛있는 커피 한 잔 사라고 웃으며 퉁칠 수 있는 관계. 꼭 커피를 사지 않아도 그럴 수도 있지 뭐, 라고 생각하는 편안하고 덜 계산적인 관계. 그 관계들로 이루어진 사회.
이상적이고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런 사회를 꿈꾸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라 믿는다. 쇠고랑 차거나 경찰 충돌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공정보다 더 따뜻한 믿음의 문제가 아닐까.
문득, 사람 사는 세상에 공정함은 참 필요한 일이지만 그 공정함은 그저 원칙과 계약이 강조되는 업무적 관계 속에서나 적합할 것 같은 차가움이 묻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크를 둘로 나누지 않고 함께 마주 앉아 퍼먹으면서 내가 덜 먹든 상대가 많이 먹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인간 관계일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좀 덜 먹고 더 먹고 상관하지 않고 큰 불만도 갖지 않는 모습. 이번엔 네가 케이크를 많이 먹었으니 다음에는 크림 올린 맛있는 커피 한 잔 사라고 웃으며 퉁칠 수 있는 관계. 꼭 커피를 사지 않아도 그럴 수도 있지 뭐, 라고 생각하는 편안하고 덜 계산적인 관계. 그 관계들로 이루어진 사회.
이상적이고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런 사회를 꿈꾸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라 믿는다. 쇠고랑 차거나 경찰 충돌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공정보다 더 따뜻한 믿음의 문제가 아닐까.
2010년 11월 8일 월요일
드라마 - 수업 준비하다가 문득
<섹스 앤 더 시티>를 브런치, 섹스, 구두에만 연결시키는 한심한 평론들은 그리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내가 그 드라마를 열심히 본 것은 아니지만, 그저 몇 편 봤을 뿐인데도 그것은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에 대한 통찰과 고민이 함께 존재했던 드라마였다. 드라마 몇 편 보고 바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문화평론가들의 시각은 마치 <CSI>를 현대적인 시각효과로 그려낸 범인잡기 드라마로만 인식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CSI> 이전에 <수사반장>이 있지 않았던가. <CSI>는 현장에서 살아가는 수사관들의 삶이 병치된다. 그리고 범죄의 주변에서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존재한다.
최소한 나의 기억에서 이 드라마들의 장점은, 화려함이나 시각적 즐거움, 나의 머리로는 도저히 계산되지 않는 멋진 카메라 워크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나에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극화되고 과장되었다 하더라고 그것은 사람의 이야기였지 구두와 브런치와 섹스와 혈흔과 첨단 무기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증명의 이야기는 분명 아니었다.
지난 주 영상과 문화 수업에서 텔레비전, 드라마, 가족 등을 다루면서 한국 드라마 속의 가족에 대한 묘사뿐 아니라 현 시대를 살아가는 20대의 삶에서 학생들이 경험하는 가족의 문제와 드라마 속 가족의 모습을 겹쳐놓고 보았을 때 나올 수 있는 이야기를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것이 삶과 사람과 미디어를 동시에 고려하려는 인류학적 시도의 한 영역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드라마들을 본다면 하나의 에피소드를 보더라도 다른 이야기가 가능할 것이다.
(무엇인가 예를 들고 이 이야기를 좀 더 진척시켰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불가능하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내가 질 것 같은 상황. 다음으로 미루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기)
2010년 9월 2일 목요일
소비자가 만들어낸 음료
(2010년 4월 22일 쓴 글입니다. 이전 블로그에 있던 것을 옮겨왔습니다.)
마운틴 듀에서 소비자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새로운 제품 세 가지를 만들어냈다는 기사입니다. (기사는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만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http://mashable.com/2010/04/19/dewmocracy-2-flavor-nations/
펩시에서 만들어내는 마운틴 듀가 'DEWmocracy'라는 프로젝트명을 이용하여 전적으로 소비자들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제품 개발, 론칭뿐 아니라 홍보까지 이루어 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당연하구요.
저는 이 기사를 보고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소비자의 역할이라는 것이 어떤 제품의 개발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전처럼 단순히 소비하는 존재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제품을 개발하도록 하는 힘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사례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현대사회에서 소셜 미디어가 갖는 역할에 대해서 조금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문화적 특성을 매체에 대한 관심으로 풀어내는 미디어 인류학(media anthropology)에서 관심을 갖고 연구할만한 영역이 되는 것이겠지요.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미디어들이 우리의 삶과 행동에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고 인류학적 관심의 폭을 넓혀 가야 할 것입니다.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홈페이지에 올린 글입니다.)
마운틴 듀에서 소비자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새로운 제품 세 가지를 만들어냈다는 기사입니다. (기사는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만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http://mashable.com/2010/04/19/dewmocracy-2-flavor-nations/
펩시에서 만들어내는 마운틴 듀가 'DEWmocracy'라는 프로젝트명을 이용하여 전적으로 소비자들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제품 개발, 론칭뿐 아니라 홍보까지 이루어 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당연하구요.
저는 이 기사를 보고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소비자의 역할이라는 것이 어떤 제품의 개발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전처럼 단순히 소비하는 존재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제품을 개발하도록 하는 힘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사례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현대사회에서 소셜 미디어가 갖는 역할에 대해서 조금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문화적 특성을 매체에 대한 관심으로 풀어내는 미디어 인류학(media anthropology)에서 관심을 갖고 연구할만한 영역이 되는 것이겠지요.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미디어들이 우리의 삶과 행동에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고 인류학적 관심의 폭을 넓혀 가야 할 것입니다.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홈페이지에 올린 글입니다.)
뉴로마케팅
(2010년 4월 22일에 쓴 글입니다. 이전 블로그에 있던 것을 가져 왔습니다)
우연히 '뉴로 마케팅'이라는 용어를 듣게 되었습니다.
관련기사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42109043978224&outlink=1
말 그대로 신경과학과 마케팅을 결합시키는 방법이라는군요.
이런 정보를 남기는 이유는, 인류학이 여러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현재 저의 입장에서는 위 기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뉴로 마케팅이 진정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과 예측을 제공할 것인지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소비 유형과 패턴을 면밀히 관찰하고 다각적인 설명을 시도하려는 인류학적 접근이 이와 같은 영역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 모습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 고민해 본다면 여러 측면에서 큰 이점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에 발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세세하고 사소한 것까지도 열심히 관찰하는 자세를 계속 견지한다면 우리처럼 인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을 것입니다. (뉴로 마케팅과 직접적인 관련없는, 약간은 뜬금없는 이야기같지만) 전 이 기사를 보면서 인류학적 관점을 결합시킬 수 있는 방향을 자꾸 탐구해 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접점이 멀리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뭐..... 모두 열심히 하자는 거지요. 현실에 발 붙이고, '올바른' 관점과 생각으로.
모두 화이팅입니다. ^^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홈페이지에 올린 글입니다.)
우연히 '뉴로 마케팅'이라는 용어를 듣게 되었습니다.
관련기사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42109043978224&outlink=1
말 그대로 신경과학과 마케팅을 결합시키는 방법이라는군요.
이런 정보를 남기는 이유는, 인류학이 여러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현재 저의 입장에서는 위 기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뉴로 마케팅이 진정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과 예측을 제공할 것인지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소비 유형과 패턴을 면밀히 관찰하고 다각적인 설명을 시도하려는 인류학적 접근이 이와 같은 영역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 모습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 고민해 본다면 여러 측면에서 큰 이점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에 발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세세하고 사소한 것까지도 열심히 관찰하는 자세를 계속 견지한다면 우리처럼 인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을 것입니다. (뉴로 마케팅과 직접적인 관련없는, 약간은 뜬금없는 이야기같지만) 전 이 기사를 보면서 인류학적 관점을 결합시킬 수 있는 방향을 자꾸 탐구해 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접점이 멀리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뭐..... 모두 열심히 하자는 거지요. 현실에 발 붙이고, '올바른' 관점과 생각으로.
모두 화이팅입니다. ^^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홈페이지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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