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0일 일요일

1이 0으로 바뀌는 순간, 죽음

11% > 45%

영화 <I, Robot>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

스푸너 형사는 사고로 차에 갇힌 채 다른 차와 함께 강물에 빠진다. 다른 차에는 소녀가 타고 있었다. 그들을 구하러 들어온 로봇 NS4는 소녀를 구하라는 스푸너 형사의 다급한 외침을 무시한 채 어린 소녀 대신 스푸너 형사를 강 위로 끌고 나온다. 왜 소녀 대신 자신을 구했는지 묻는 스푸너 형사에게 로봇 NS4는 "당신의 생존 가능성은 45%였지만 소녀의 생존 가능성은 11%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스푸너 형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논리적으로 내가 생존 가능성이 높았다 하더라도 그 소녀의 생존 가능성 11%는 그 부모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이라고.

이후 스푸너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비록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소녀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숫자로 환원된 생존 가능성이 누군가의 희망을 완전히 앗아가 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경험은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 다른 삶의 시작, 죽음...... 그런데

많은 사회에서 죽음은 삶과 연결되거나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문화적 설명 체계를 갖는다. 티벳에서는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이라 불리는 장례를 통해 죽은 자의 영혼이 새의 몸을 통해 다시 돌아온다고 하고 인도는 화장을 거친 후 영혼이 물을 통해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 몽족은 아이가 태어나면 태반을 땅에 묻는데 사람이 죽으면 태반이 묻힌 곳에 돌아와 그것을 저고리처럼 입고 저 세상으로 간다/다시 태어난다. 기독교에서는 아예 부활을 이야기한다.

종교학자 정진홍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생명이 없는 것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듯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것의 죽음도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살아 있는 것만이 죽는 것이라면 죽음은 그 죽음 주체가 실은 살아 있던 것임을 증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죽음은 ‘삶이 도달한 마지막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정진홍 2003 [만남, 죽음과의 만남], 서울: 궁리. 20쪽)



그러나 죽음이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저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으로 연결된다고 해서 그와 같은 문화적이면서 이론적인 설명이 죽음에 대한 슬픔을 경감할 수는 없다. 죽음을 마주한 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이런 문화적 어법이 설명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그저 어제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의 부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존재의 차원에서 죽음은 나쁘고 위험하고 슬프다.
셸리 케이건은 자신의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2012, 서울: 엘도라도)에서 죽음이 나쁜 이유는 “죽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존재는 왜 나쁜 것인가?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있으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좋은 것들을 죽고 나면 하나도 누릴 수 없다.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 했다. (304쪽) 물론 이 말은 살아 있으면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가정에 입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박탈당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에게 죽음은 슬픈 일이다.
함께 살았던 늑대의 삶과 죽음을 경험한 마크 롤랜즈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며 인간의 삶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에 묶여 있는 존재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좇는 존재이다. 우리 삶의 의미와 삶의 끝은 시간의 선을 한참 따라 내려간 후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의 선은 우리를 매혹시키기도 하고 공포에 떨게도 한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고통이다.” (마크 롤랜즈 2012 [철학자와 늑대], 서울: 추수밭. 280쪽) 결국 그의 이야기처럼 "죽음은 우리로부터 미래를 박탈"한다(271쪽).



삶을 한참 따라 내려가야 비로소 삶의 의미를 알게 되는데, 그것을 따라 가기도 전에,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죽음에 이르게 된 삶에 대해 아무렇게나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죽음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숫자로 치환되는 죽음

현대 사회가 되면서 죽음이 삶의 끝이고 미래의 박탈이며 결국은 상실이라는 사실로 이야기되기보다 그저 몇 자리의 숫자로 환원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도시 스프롤 현상 탓에 많은 미국인들이 과거보다 훨씬 자주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임에 따라, 미국의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4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미국의 연간 총기사고 사망자 수보다 1만 명이 많다. 2001년 9월 11일 테러로 죽은 미국인 수보다 10배 이상 많다. 비유하자면, 항공기가 추락해 모든 탑승객이 사망하는 사고가 3일마다 1번씩 계속 벌어지는 셈이다. 미국 고속도로에서 매년 이만큼의 사람이 죽는다. 전 세계적으로 10세부터 25세 사이 연령대의 최대 사망 원인은 교통사고다. (찰스 몽고메리 2014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 서울: 미디어윌. 156-157쪽)

위에서 인용한 책은 도시의 과도한 확장과 교외지역 개발, 속도 위주의 도로 정책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내용이고 교통사고에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서술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사람들의 죽음은 삶의 마지막 여정으로서 애도되는 것이 아니라 자료화되기 위한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다뤄진다. 죽음이 숫자가 되는 순간부터 그 죽음은 삶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데이터가 되어 사라진다.

죽음은 삶이 멈춘 시간인데 죽음이 죽음으로 이야기되지 않고 숫자로 환원되어 통계자료가 되는 순간 남은 가족들의 상실이라는 감정적 경험은 탈각된다.

교통사고 사망자가 9.11의 사망자보다 많다고 해서 9.11 사건을 별 것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교통사고나 9.11이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하루아침에 1이 0이 된 것이다. 사망자의 수가 많다고 해서 어떤 죽음을 교통사고와 비교하여 그리 대단한 것 아니니 호들갑떨지 말라고, 이제 그만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말은 그들의 죽음이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 여겨 공감하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존재 변화를 숫자(나아가 보상 따위의 경제적인 문제)로 바꿔치기하는 행위이다. 인권을 설명하면서 린 헌트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용어에서 따온 '상상된 공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린 헌트 2009 [인권의 발명], 파주: 돌베개. 39쪽) 죽음을 숫자로 치환하는 순간 이 공감 능력은 상실한 채 이성과 논리, 소위 말하는 '객관적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행위를 '설명'이라 믿게 된다. 숫자로 이루어진 소위 '객관적 데이터'를 들이대면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스푸너 형사를 물에서 건져낸 NS4의 헛된 설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상상된 공감의 부재

몇 달 전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이런 말을 썼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xx위 등 죽음이 숫자로 치환되는 한 그 죽음과 관련된 슬픔에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김ㅇㅇ 전 KBS 보도국장의 발언은 그렇기 때문에 더 섬뜩하다. '안전에 부주의한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이야기하고자 했다'는 '말은 2014년 4월 16일의 안타깝고 아까운 죽음들을 그저 숫자로만 치환하여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자신은 초연해 있다는, 그 죽음에 대한 애도와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자기고백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의 수많은 교통사고 희생자들까지 '아무 것도 아닌 죽음'으로 만들어버렸다."

세월호 사고로 인한 죽음도, 교통사고에 의한 죽음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아라. 자식을, 소중한 가족을 잃은 것은 그들과 가족들의 미래를 100% 상실한, 죽음만큼 아픈 경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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