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일상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일상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1년 9월 21일 화요일

면도기 교체 중

 거의 십여 년 이상 질레트를 써왔다. 프로글라이드로 시작해 프로글라이드 플렉스볼 핸들을 사용하고 면도날은 프로글라이드를 사용했더랬다. 질레트를 계속 이용했던 것은, 별다른 이유없이 그냥 관성에 의해서. 

그러다가 올해 여름 면도기/면도날을 바꿔 써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면도날의 가격도 가격이지만(면도날에 들어가는 비용을 조금만 모으면 전기면도기 가격이 되니, 몇 년 전에 전기면도기로 바꿀까를 잠깐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어느 순간부터 피부 트러블이 좀 심각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면도를 하다가 아주 가끔 피를 보는 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코 아래 인중 부근에 아주 희미한 붉은 트러블들이 없어지지 않았다. 면도할 때 쉐이빙크림(예전에는 가스를 이용해 분사하는 젤이나 크림을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튜브에 들어있는 쉐이빙크림만 사용한다.)을 반드시 사용하고 면도 후에는 스킨부터 시작해 몇 가지로 케어함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트러블의 흔적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관성에서 벗어나 면도기를 바꿔보기로 했다. 대략 올해 말까지 6개월 정도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고 내 피부에 잘 맞는 것을 찾아보려 한다. 

여러 상품평, 공식 홈페이지의 광고들과 사람을 현혹하는 설명들을 차분히 보고 하나하나 시도해보기로 했다. 면도기/면도날에 대한 많은 인터넷글들, 유튜브 설명들을 봤고 어차피 취향이란 개인적이고 피부상태 역시 개인의 문제라 정답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직접 경험하는 것만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 생각했다. 

먼저 시도한 것은 쉬크의 하이드로5 프리미엄. 이에 대한 설명들은 인터넷에 엄청나게 많이 있으니 따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일단 실험삼아 사용한 25일의 경험만 이야기한다면, 매우 만족스럽다. 면도날 자체의 윤활젤도 매우 오래 가고 날도 오래 간다. 무엇보다 코 아래 불긋불긋하던 피부트러블은 사라졌다. (면도기만 바꿨고 사용하던 쉐이빙크림이나 화장품들은 쓰던 것 그대로이다.) 커스텀 날은 써보지 않았지만, 다른 면도기들을 사용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현재로서는 쉬크로 정착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와이즐리 센스를 사용한지 이틀 되었다. 다른 글들에 보면 절삭력이 떨어진다는 등의 이야기가 많던데 내 경험으로는, 절삭력 아주 좋다. 잘 깎이고 피부에 잘 밀착하는 느낌이다. (절삭력이 좋으면 피부 밀착력이 좋다는 것이고, 그 경우 피부 트러블의 가능성도 커질 것이라 생각한다. 이건  며칠 더 사용하면서 두고 볼 일이다.) 잘 깎이고 피부 트러블도 없다면 가격의 메리트가 있으니 와이즐리로 정착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기는 하는데,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다. 한두 주 정도 더 써볼 생각이다. (와이즐리는 8,900원 체험키트를 주문하면 두 가지 날을 모두 제공한다. 나에게는 절삭력보다 피부 보호가 조금 더 중요한 일이라 센스를 주문했고 최근 나온 프로가 함께 왔다. 이건 센스를 며칠 더 써보고 테스트해 볼 생각이다.)

와이즐리를 테스트해본 후에는 레이지소사이어티도 시도해 볼 생각이다. 좋은평과 나쁜평 사이에서 길을 잃느니 내가 직접 써보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써본 결과 질레트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다. 

2016년 8월 19일 금요일

산타, 크리스마스, 지구멸망에 대해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길래 공유했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를 기본적인 수학과 물리학으로 설명한 동영상이다. 페이스북에서 공유된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재미있었다.

이 이론에 대해 집의 위치가 실제로는 균일하지 않다거나, 굴뚝이 없는 아파트는 묶음배송을 할 것인가, 경비실에 맡길 것인가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변수들을 통제한 모델을 만들어야 이론화가 가능할테니 사소한 문제들은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오류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아이들의 수가 과도하게 계상되었다는 것일테다.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는 아이들은 제외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물론 '우는 행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눈물이 최소 0.5ml이상 흘러야 한다거나, 눈물이 나지 않더라도 60db 이상의 성대 긁는 소리가 5초 이상 있을 경우는 우는 것으로 간주한다거나, 눈물과 소리가 최소 2분 이상 지속해야 한다거나 하는 등의 기준이 필요하다. 원래 가사에 '산타할아버지는 리스트를 만들어 두 번 이상 체크하신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봐서 리스트에 체크를 할 정도의 기간, 즉 '전년도 12월 26일부터 당해년도 12월 23일까지'와 같은 기준은 이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는 아이를 선별하는 기준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산타만의 재량이라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산타 1인에게 이렇게 막대한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타당한가, 산타가 만약 자기 마음대로 기준을 바꿨을 때 그에 대한 제재가 가능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있다면 결국 우는 아이 선별 기준에 대한 사회적 제도화가 필요한 것이다.

12월 24일 산타에 의한 소닉붐, 그리고 그로 인한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어떤 분들은 산타의 수를 늘리면 어떤가, 라고 제안해 주셨다. 그렇다면 그 적정수는 어느 정도일까? 지역별로 할당하여 배치할 것인가, 31시간을 시간으로 나누어 3교대 혹은 4교대 방식으로 운영할 것인가 등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제일 쉬운 방법은 3억 명 아이들이 약 8570만 가구에 산다고 하니 그 정도 수의 산타 혹은 대행을 통해 선물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현재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각 집의 부모들이 산타의 하청을 받아 선물을 전달하는 방식.)

이 외에도 순록의 과도한 노동강도를 지적해 준 분도 있다.

위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소닉붐으로 지구가 멸망하게 되었을 때 좀 더 중요한 문제는, 산타의 존재를 모르는/산타의 존재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 사는 17억 명 정도의 아이들이다. 이들이 인지하는 세상 속에는 산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산타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게 된다면 산타의 존재를 모르는 아이들은 지구가 멸망하는 것에 대해 전혀 대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믿지도 않고 존재조차 모르는 존재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지구가 멸망하게 되었는지 납득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현재도 자신들이 모르는 이유로 고통받는 많은 어린이가 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벌어지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회의 사람들은 왜 자신의 마을이 전쟁에 휩싸여 있는지 명확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공포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최근의 한 사진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들에게 12월 24일 지구 멸망을 미리 대비시키기 위해서는 산타의 존재를 믿는 다른 사회의 믿음체계를 먼저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나서야 산타에 의한 소닉붐이라는 과학적 현상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간의 대화가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지구가 멸망하는 것은 과연 나쁜 일인가와 같은 철학적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겠다.

재미있자고 한 이야기를 다큐로 받는 것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쓰다보니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은 상상력의 산물 혹은 상징적 서사에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뼈속까지 고착된 노동, 가치, 독점시장, 권력, 제도화 등의 용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막고 동심을 파괴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2014년 9월 5일 금요일

도로명 주소에 대해

며칠 전 페북에 썼던 것인데, 기록을 위해 여기에도 남겨 놓기로 함)

도로명 주소는 사람들의 삶의 기반을 원칙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빠르고 효과적인 이동이라는 근대적 목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도로명 주소 홍보에서 가장 많이 설명한 것은 '찾아가기 쉽다'는 것이다. 찾아가기 쉽도록 왼쪽, 오른쪽의 번지를 따로 부여하고 방향에 대한 기준을 설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딘가를 찾아가는 것보다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머무르는 상황에서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경우가 더 빈번하다. 찾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춘 도로명 주소는 삶의 터전인 마을이나 동네와 관련이 없다. 그런 점에서 이것의 한계는 명확하다. 우리에게 住所는 말 그대로 사는 곳이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찾아오는 데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체국 직원분들이나 택배사 직원들의 관점에서는 다른 이야기도 가능할지 모른다. 여기에 쓴 이야기는 순수하게 거주자의 관점에서만 본 것이다)

2014년 7월 17일 목요일

낯선 도시에서 걷기

도시는 많은 사람들, 많은 일들, 오래된 시간 등이 써 내려간 텍스트이다. 도시가 텍스트라는 점에서 도시는 읽기의 대상이 된다. 도시를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나의 경우 도시를 읽는 한 가지 방법은 그 도시에서 많이 걷는 것이다. 처음 가보는 도시의 경우 가능한 한 많이 걷는다. 아주 오래 전 중국 난징(南京)에 갔을 때 첫날 버스를 잘못 내려 무거운 짐을 맨 채 3시간 이상을 걸었던 적이 있다. 분명 실수였고 엄청나게 힘들었지만 그 덕에 난징의 지리는 어느 정도 익혔다. 다음날부터 시내를 다닐 때 머리 속에 지도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타이베이 시립도서관 가는 길
내가 걷기를 선호하는 것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걷기에 익숙해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차가 없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는 방법을 먼저 알아보고 움직이게 되는데 그 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애매한 경우, 대중교통을 이용하나 그냥 걸어가나 시간이 10분 정도 차이 밖에 안 날 것 같으면 그냥 걷는다. 타이베이에서 수훠기념종이박물관(樹火紀念紙博物館)을 갈 때 그랬다. 숙소에서 그곳까지 지도를 보니 10분 정도 걸어가서 지하철 한 정거장을 가서 또 10분 이상 걸어야 하거나, 지하철 한 정거장 가서 환승한 후 다시 한 정거장 가서 또 다시 10분 이상 걷는 길이었다. 에이, 이렇게 귀찮게 갈아타고 계단 오르락내리락 하느니 차라리 걷자. 이런 결심을 하게 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이유는 차를 갖고 있지 않으니 직선거리로 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걷기이기 때문이다.

걷는 것은 이 곳의 상황들과 도시의 일련의 흐름들에 대해 감을 잡는 시간이다. 멀리 가기는 어렵지만 주변을 걷다가 먹을 것도 사서 먹고 카페에도 들어가 차를 한 잔 하면서 퍽퍽한 다리를 쉬어가다보면 어설프기는 해도 그곳 사람들의 삶의 자락에 슬그머니 포함되는 기분을 간혹 느끼게 된다. 그것이 그저 기분일 뿐일지라도.

물론 한 번에 다 읽어낼 수는 없겠지만 걷기는 최소한 그 도시의 결을 느끼는 시도로서는 중요한 성과를 가져다 준다. (단체 관광 혹은 패키지 여행의 경우 걸을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관광상품의 목적은 경관을 구경하는 데에 있지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는 데에 있지 않다. 특정 포인트를 향한 이동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었는가,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경관 포인트'와 쇼핑센터를 들렀는가만이 단체 관광 상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걷기의 과정이 생략되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의 삶에 포함되는 기분’이란 느끼지 못한다. 그곳 사람들 역시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동차나 버스, 오토바이 등의 탈것이 가기 위한 것이라면 걷기는 서기 위한 것이다. 서기 위한 걷기란 '무엇인가와의 만나기'의 다른 표현이다. 여행안내서에서 소개한 곳을 가기 위한 목적지향의 움직임이 아니라, 의도치 않았던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을 하게 되기도 하며 어떨 때는 그저 머리를 식히기 위한 목적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바오짱옌 국제예술촌 입구

웨이룬 국수집
(위 사진은 최근 관심이 생긴 주제 때문에 국제예술촌이라 불리는 바오창옌(寶藏巖)에 갔다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국수집이다. 들어갈 때는 그저 배가 고파서 들어갔을 뿐인데 상당히 맛있었다. 직접 손으로 뽑은 면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나와서 간판을 보니, 역사가 꽤 된 집이었다.)

이런 경우처럼 그저 걷다가 배가 고파 들어간 음식점이 예상외로 맛있고 여행안내서에 소개되어 있지 않았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아주 호평을 받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 익숙하지 않은 도시에 왔을 때 맥도날드나 KFC는 피하려고 한다. 그런 곳은 한국에서도 쉽게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걷다가 배는 너무 고픈데 적당한 식당을 만나지 못한다면 맥도날드가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수도 있다. 현지화된 맥도날드를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이때뿐이니 말이다.




타이베이의 유명한 음식 중 하나는 소고기 탕면(牛肉麵)이다. 이곳은 타이베이 안내서에 나와 있는 곳이어서 꼭 가리라 마음먹고 간 곳이다. 정말 맛있다. 국물을 한 숟가락 먹는 순간, 혼자 감탄했다.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융캉제(永康街)의 융캉 소고기 탕면과는 비교가 안되는 맛이었다. 매년 있는 소고기 탕면 대회에서 상을 많이 받았다는데 나는 2007년에 상을 받은 두당이몐(獨當一麵)을 먹었다. 배부르게 먹고 나와 옆집에서 푸젠의 후추빵 파는 곳을 발견. 하나를 사먹고 소화를 시킬겸(한국에 돌아올 날이 며칠 안 남았던 터라 빨리 소화를 시키고 과일음료를 사먹을 작정이었다) 지하철 역의 반대방향으로 걷다가 서점 거리의 두 군데 작은 서점에서 필요한 책을 각각 한 권씩 찾아낸 것도 중요한 수확이었다.

땀흘리며 후추빵 만드는 청년들

물론 걷다가 비를 만날 수도 있다. 습도는 엄청나게 높고 온도는 35-36도 정도 되는 여름날의 타이베이에서는 흔하게 경험하는 일이다. 한 두 시간의 소나기가 더위를 잠시 식히니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든다. (덥고 습한 사우나 기후에 익숙해서인지 타이베이의 친구들은 베이징과 같은 '건조한 여름'이 오히려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피부가 너무 건조해진단다.) 비를 만나면, 근처 카페에서 쉬어갈 명분이 생긴다. 에어콘으로 시원하게 '히야시'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본 것들을 기록할 시간도 벌게 된다.



여름의 타이베이는, 솔직히 걷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 아침에 나갈 때 '현재기온 35도'라는 안내를 보는 순간, 출발하기 전 호텔 로비에 서있어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든다. 그곳의 기온은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을 갖는다. 하지만, 2-3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가는 동안 그늘을 찾아 걷고 문이 열린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막강한 에어컨 냉기에 잠시 잠깐 기뻐하면서 가다보면 지하철로 빠르게 이동했을 때 당연히 보지 못했을 여러 가지를 보게 되고 알게 되고 느끼게 된다.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특정 목적에 종속된 이동이 아닌,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 기꺼이 설 수 있는 걷기란 도시를 읽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2014년 6월 21일 토요일

좀비: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도시는 악이 상존한다."

사실 이 말이 정확하게 맞는 말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악'이라 생각하는 행동에 대해 그것의 행위자는 그것을 악이라 정의하는 것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그 자신에게 도시는 악이 상존하는 곳이 아니다. 여러 낯선 사람들이 섞여 사는 곳일 뿐이고 자신은 자신의 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행위를 반복하고 또 다시 기획한다.

그 행위자는 나의 옆집에 살고 있거나, 오늘 아침 출근길에 마주쳤거나, 내일 가는 식당의 옆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다. 공포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더 크게 느끼는 감정적 반응이고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더 크게 느끼는 감정이라 할 때, 사회가 악으로 정의한 행위를 반복하는 자는 그 행위를 가할 상대에 대해 알고 있는 반면 그 행위의 대상인/대상이 될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공포란 후자의 몫이다.

기괴한 연쇄살인자는 자신만의 '좀비'를 만들어내려 하고 그 행위들은 중산층의 평온한 가족적 외형 속에 가려진다. 미국 중산층 가족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얇은 껍데기 속에 가려져 있는지, 그 속에 숨겨진 잔혹함의 상상력이란 어떤 모습인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문제는, 그 껍데기가 얄팍하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이라 정의되는 행위를 실제로 가려주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이 책이 주는 무서움은 주인공 Q__ P__의 행위보다, '평범한 가족의 외피'에 둘러싸여 그것이 감추어진다는 데 있다.
 

2013년 10월 6일 일요일

파일 이름 붙이기

(페이스북에 낙서처럼 적은 것을 이곳에 옮겨 온 것입니다)

문서작업을 하고 파일명을 결정하는 순간은 논리적이면서도 예술적이어야 하고 '현재 내가 만든 이 문서의 특징과 속성에 부여한 나의 명명법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거야'라 믿는 마법의 순간이다. 글과 책을 다시 읽을 때 누구나 항상 경험하듯이, 예전에 봤을 때와는 다른 점이 눈에 띄고 그 책의 색다른 특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파일이라는 것도 그렇다. 파일의 이름만 가지고서는 내용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을 때가 있어서 일일이 파일을 열어봐야 그 특성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왜 파일이름을 이렇게 붙였을까 의아해한다. 내용과 파일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서도 나중에 또 헷갈릴 수 있으니 이름바꾸기를 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 믿게 되는 경우도 많고 나는 실제로도 그렇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만의 체계가 만들어지기는 한다. 그것은 자신의 컴퓨터 세상에 구현한 분류체계이고 범주화의 논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체계화와 범주화의 '법칙' 덕에 파일의 내용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뒷전에 밀리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파일을 첨부한 메일을 보낼 때 혹은 누군가의 파일을 받을 때 내가 만든 분류체계와 법칙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충돌하는 경우는 분명히 존재한다. 다른 사람이 보낸 파일을 나의 컴퓨터에 저장하는 순간은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분류체계'를 '나의 방식'으로 변형하여 나의 세계에 끌어들이는 일련의 자문화중심주의적 행위이다. 두 세계관의 부딪힘은 거대한 문명의 충돌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파일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떠올랐던 단어가 그 파일을 '영원히'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되는 것(이 의심은 파일 이름을 만들 때보다 필요한 파일을 찾으려 할 때 더욱 강해진다)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일테지만 그 의심은 내가 의식하기 전에 이미 사라진다. 그 의심에 휘말리기보다는 그냥 지금 이순간에 떠오르는 단어로 휘리릭 파일 이름을 붙이고 엔터키를 눌러 저장해버린 후, 언젠가 비슷한 생각을 또 다시 하겠지. "아~ 내가 분명히 저장했는데 찾을 수가 없네"라며. 

파일의 이름붙이기처럼 한순간의 인상만으로 현재를 평가하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또 앞으로도 얼마나 많을까. 김춘수의 시처럼 무엇인가에 대한 명명이 그것에 대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행위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존재감의 부여가 영원히 신뢰할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생활에서 어쩌면 더 쉽게 경험하거나 발견하게 되는 것이겠지. 그 존재감의 부여가 찰라적이고 순간적인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사람에게 부여했던 존재감이 시간이 지나 달라졌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파일 이름이 내용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 될 것 같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여겨지지 않을 수 있을까.......

(밀린 일들을 하면서 파일 저장하다가 다른 길로 이렇게 빠졌는데 이건 그냥 그 일을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일뿐...... 아무렇게나 파일 저장하고 원래 하던 일 하기로.... ㅠㅠ)

2013년 9월 15일 일요일

철학자와 늑대

학과의 다른 선생님께서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북카페 행사에 소개하신다고 하여 읽은 책.

북캐스트 등에 이미 소개되어 어느 정도는 알려져 있던 책.

최근에 이런 류의 책을 읽은지 오래 되어 약간 낯설었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남을 책.

늑대를 키웠고 함께 생활했고 그를 보낸 철학자가 늑대를 통해, 늑대와 함께 행복과 소유와 시간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책. 사람을 '상대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이 왜 필요한 일인지, 이 세상에서 인간만이 우월하고 잘났다 주장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질문하는 책.

"영장류는 행복을, 측정하고 무게를 재며 수량화하여 계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영장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비용-편익 분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
늑대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늑대는 진정한 가치는 잴 수도 거래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끔은 하늘이 두 동강 나도 옳은 것은 해야 한다고 말한다." (20, 22쪽)
"근거, 증거, 정당화, 보장. 정말 사악한 동물들에게만 필요한 개념이 아닌가? 불만이 많을수록 더 사악해지고, 화해에 무감할수록 정의는 더욱 필요해진다. 자연계에서 유일하게 영장류만이 도덕적 동물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불만으로 가득하다." (112쪽)
 
"우리가 다른 동물들을 판단할 수 없다면,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하다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들을 존경할 수 있다. 명료하지는 않다 해도, 이러한 존경심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다른 동물들은 가지고 있다는 인식 위에서 시작될 것이다. 보통 누군가를 존경하는 마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점을 발견할 때 나타난다." (148쪽)

책의 곳곳에서 인간 자신의 삶을 거리를 두고 보도록 요청하는 진지하고 깊이있는 문장들이 살아있다.

"삶의 의미가 소유할 수 있는 무언가에 있다는 생각은 추측하건대 무엇인가를 쟁취하려는 영장류적 영혼의 유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영장류에게 소유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영장류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 하지만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의 사실이나 소유의 정도가 아니다.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늑대가 되느냐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면서도 우리 안의 영장류는 소유의 위대함에 대해 다시 주장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영장류가 되느냐의 문제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가장 되고 싶어 하는 영장류는 우리가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목표가 된다. 영민함, 성실함, 거기에 운까지 따라 준다면 충분히 성취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배우기 어려운 교훈은, 삶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의 피조물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순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영장류가 삶에 대한 그럴듯한 의미를 찾는 것이 그렇게도 힘든 것이다. 순간은 영장류가 절대 소유할 수 없는 대상이다. 순간은 욕망하는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손을 뻗쳐 통과해 버리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소유는 순간들을 지워 버리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소유하려 하고, 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거대한 땅 따먹기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우리는 시간의 피조물이지, 순간의 피조물이 될 수는 없다. 순간은 우리가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항상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다. 
'순간에 충실하라'는 피상적인 설교를 되풀이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라고 권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살면서 만나는 몇몇 순간들, 이 특정한 순간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순간들이 바로 인생 최고의 순간인 것이다." (319-320쪽)

사랑하던 늑대가 죽고 남겨진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브레닌을 묻던 밤, 랑그도크 지방의 살을 에는 추위와 장례식용 모닥불에서 번지던 밝은 빛의 온기. 그 안에서 인간 조건의 근원을 찾아본다. 선택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희망을 주는 따스하고 너그러운 삶을 택할 것이다. 다른 편을 택한다는 것은 미친 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당도한다면 늑대의 냉정함으로 살아 나가야 한다. 힘들고, 차갑고,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삶을 살아 내야만 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바로 이 순간들이 삶을 가치있게 만든다. 결국 우리의 담대한 도전만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만약 늑대에게 종교가 있다면, 바로 이런 교리를 들려줄 것이다." (330쪽)

이 책의 이야기는...... 들을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강추!! 

 

2013년 8월 30일 금요일

설국열차

자리에 앉아 안전장치를 내려 몸에 밀착시키고도 여러 차례 흔들어본다. 그래도 불안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어렵다.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금속들의 소리와 함께 출발한 롤러코스터에 앉아 몸이 서서히 뒤로 기울어지며 올라가는 그 순간은 두려움과 공포의 순간이다.

공포는 불확실함, 미지의 상태가 만들어낸다. 앞에 어떤 경로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등 뒤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불확실할 때, 침대 아래에 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차마 볼 수 없는 상태, 문 뒤에 무엇/누구인지가 없다고 확신할 수 없을 때,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와 마주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공포'라는 단어이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그 무엇과의 조우가 현재의 추구가 만들어내는 고통과 공포를 상쇄할 수준일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는 길은 공포를 이겨내고 미지에 맞설 용기를 필요로 한다.  

커티스가 그 용기를 가진 인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는 꼬리칸을, 보다 정확하게는 그곳에서 있었던 자신의 젊은 날에 대한 기억과, 자신 스스로가 (어떤 맛을 알아버린) 두려운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앞으로 향한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그랬고 많은 영웅물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두의 운명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이 정말 자신인지 혼란스러워하던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로 그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의 운명'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 때문이었다. (윌포드를 만나기 전 그가 남궁에게 자신의 긴 이야기를 하는 시퀀스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회상씬으로 보여줘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던데, 개인적으로는 문앞에서 과거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기억/과거를 극화시키지 않고 누군가에게 토로하는 모습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 적절했다고 본다.) 엔진룸(엔진은 그것 자체로 질서와 제어의 구체적 사물이면서 동시에 은유이다)에 혼자 서 있던 그 순간은 윌포드(그에게 테크놀로지는 인간 구원의 수단이다. 실패한,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수단이기는 하지만)의 말처럼, 실제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자신의 상황, 꼬리칸부터 엔진까지 달려오는 동안 마주했던 많은 죽음들이 어쩌면 앞과 뒤(사실 이것은 위와 아래의 기만적인 수평적 전환이다)의 공모였을 뿐이고 자신은 그저 군중 속 일원이었을 뿐임을 억울하게 인정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그제서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미래의 공모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그는 결과적으로 '모두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시스템 전체의 부품처럼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희화된 방식으로 보여줬다면 <설국열차>는 그 현실이 어쩔 수 없는 질서이고 그렇기 때문에 타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고통임을 보여준다. 

영화는 엔진의 기본 속성인 질서와 제어, 질서와 균형이라는 명목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삶의 목적이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생양을 내세우는 정당화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모순적 상태를 기만적 수평상태의 위계화된 수직사회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꼬리칸에서 엔진에 이르는 그 수평선/수직선의 이동은 곧 위계의 시간성을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꼬리칸에는 창이 없기 때문에 시간을 스스로 인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시간마저 이 영화에서는 한정된 재화이다.) 

요나는 기차를 빠져나왔지만 영화를 본 우리들은 여전히 기차에 올라 타 있다. 


2013년 6월 24일 월요일

기억과 기계와 인간: 오영진의 <어덜트 파크>

코엑스에 갈 일이 있어 조금 일찍 가 서울 국제도서전에 들렀다. 가지고 있던 어떤 신용카드 덕에 공짜 입장권을 받아 3,000원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이런 공짜 입장은 행사장 안에서 경험한 엄청난 지름신의 강림을 조금이라도 위안하려는 주최측의 배려일 수도 있다. ㅠㅠ)



얼마 전 우연히 책 소개를 보고 다음 학기 <디지털시대의 문화인류학> 수업에 관련될 수 있겠다 싶어 제목을 저장해 놓은 책이 있었다.

오영진의 <어덜트 파크>(2013, 창비).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을 했고, 평소 만화를 잘 안 보는 사람이지만 이 정도의 분량이라면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도서전에서 창비 부스에 들렀다가 이 책을 발견. 보려고 했던 책인데 심지어 싸게 살 수 있다니!!

며칠 전 엄기호 선생님은 트위터에서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엄쌤의 설명 그대로다. 이 책은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장기매매라는, 무엇이든 팔고 살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비열한 얼굴도 그대로 보여주며 한국사회의 직장에서, 술집에서, 휴가를 위해 떠난 관광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까지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와 함께 내가 (다음 학기의 수업과 관련하여) 주목했던 것은 기억의 문제이다.
기억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몸이 해내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것이 항상 쉬운 것이 아니어서 오래 전부터 인간들은 기억을 위한 보조장치를 활용해왔다. 동물의 뼈나 돌판을 지나 종이를 거쳐 '디지털 시대'인 지금은 USB나 컴퓨터, 스마트폰 등이 인간의 몸 외부에 위치하며 그 역할을 담당한다.
몸으로부터 벗어나 외재하는 기억들. 그 기억을 담당하는 기계들. 그 기계/기억과 대면하는 인간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내가 예전에 엄청나게 좋아했던, VHS 비디오 테이프로 봤던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5)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당신들(인간들)의 DNA 또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절점과 같은 것이다. 종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을 가지고 사람은 오직 기억으로 인해 개인일 수 있다. 설령 기억이 환상과 동의어라고 해도 인간은 기억에 의해 살아간다.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하게 했을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인형사의 말)

오영진의 <어덜트 파크>는 <공각기동대>가 제기한 여러 주제 중 하나를 이어 받는다. 자본주의에서의 사람의 관계와 함께, 기억의 위치와, 기억의 장소인 인간/기계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가 될 것 같다. 그냥 읽어보시라.




2012년 12월 14일 금요일

내셔널 지오그래피의 카메라 가방 NG A2210 영입

카메라를 자주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황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른 카메라 가방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카메라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도 그렇고.



카메라를 넣을 수 있는 배낭이 있고 적절한 크기의, 한쪽 어깨에 메는 가방도 있는데 이런 holster를 영입하려고 했던 이유는, 카메라만 단촐하게 가지고 나갈 경우에 쓰거나 혹은 큰 배낭 대신 여행용 배낭을 가지고 나서는 길에 카메라만 따로 챙기려는 것이었습니다. 카메라도 꽤 오래 쓰지만 이 가방들은 거의 평생 쓰게 될 것 같습니다.



꽤 오랫동안 관련 정보를 찾았는데 정보가 많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간단하게 남깁니다.

NG A2210에는 기본적인 표준 줌 렌즈를 물린 DSLR이 들어갑니다. 저는 세로그립없는 50D에 후드뺀 17-55물려서 세로로 넣으니 딱맞습니다. 렌즈 양 옆에 아주 미세한 공간이 남는데 렌즈캡 혹은 배터리 정도 들어갈만큼의 공간입니다. 좀 빡빡하게 넣는다면 배터리 충전기 정도가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만 그리 추천할만하지는 않습니다.  앞쪽주머니에 손바닥 수첩과 필기도구, 배터리, 메모리카드 정도가 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카메라 보호용 패드들이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심각하게 우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어깨패드(NG A7300)도 함께 주문했습니다. 몸이 피곤하면 사진이고 뭐고 귀찮게 되니 어깨라도 좀 편안하라고. 

(이 글을 쓰고 나서 한참 지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이 가방은 다른 분께 갔습니다. 이제는 저의 물건이 아니지만 혹시 정보가 필요한 분들이 있을지 몰라 포스팅은 그대로 남겨놓겠습니다.)

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만년필과 잉크

얼마전부터 만년필에 꽂혀 버렸다.

계기는 장인어른이 주신 만년필. 몇 해 전 잉크와 함께 주신 것인데 오래 묵혀 놓았다가 올해 초에 꺼내 쓰기 시작했다. 손에 힘을 주지 않아도 펜 자체의 무게만으로도 슬슬 부드럽게 잘 써지는 만년필에 감동하게 되었다.

컴퓨터와 핸드폰 덕에 손으로 글을 쓸 일은 거의 없는데 굳이 만년필을 쓰기 위해 손으로 쓰는 일을 만들기도 했다. 일부러 수첩과 노트를 찾았고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 즈음, 가지고 다니던 노트북컴퓨터가 이제 쉬고 싶다며 태업을 하기 시작한 것도 손으로 쓰는 일을 늘리는 데 자연스럽게 일조했던 것도 사실이다.)

다만 몇 가지 이유로 조금은 캐주얼한 분위기의 만년필이 필요했던 터라 다른 만년필을 하나 더 장만했다. 역시 만족스럽다. 만년필 짱!! (음.... 김정운 선생의 책을 읽어봐야겠군)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만년필 두 자루
오늘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만년필의 이야기는 아니다. 며칠 전 한 학생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말했던, 만년필과 잉크의 비유. 그것을 기록해 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는 것은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는 것과 비슷하다. 비어있던 컨버터에 잉크를 채우는 과정.
잉크가 차올라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하다. 컨버터의 위쪽을 돌리면 잉크가 점점 채워진다. 그렇게 채워진 잉크는 오랜 시간 사용하면서 글과 기록이 된다. (잉크의 소비는 곧 기록/글의 생산이다.) 

적절한 시점이 되어 잉크를 채우고 그것을 이용하여 글을 쓰는 만년필은,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에 대한 아주 단순한 비유가 될 수 있다. 적절한 시점에 열심히 채우고 그것을 풀어내어 어떤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무언가를 배우고 나의 말로 옮겨보는 과정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비유라는 사실, 인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특히 경쟁체제와 입시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몰아가는 한국 고등학교 교육의 문제는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모든 학생들에게 같은 색의 잉크를 채우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쓰는지에 대해서는 도통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하다. 잉크를 채웠다는 사실과 그렇게 채우는 행위에 만족할 뿐. 글을 다 쓴 후에는 잉크를 이용해 써 낸 글을 보려 하지 않고 원래 손에 들고 있었던, 이제는 잉크 컨버터가 비어버린 만년필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난 잉크를 꽉 채웠었어"라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으나 시선은 종이에 남겨진 글이 아니라 만년필에만 여전히 묶여 있다.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쓰는/써야하는 유일한 글은 '대학입학'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다른 것을 쓰려는 순간 만년필은 사라진다/빼앗긴다.

잉크를 채우는 목적은 글을 쓰기 위함이지 잉크 채우기 그 자체가 아니다. 만년필을 사용하든 볼펜을 사용하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용해 쓴 결과물이다. 필체도 다를 수 있고 쓴 내용도 다를 수 있는, 천차만별의 글. 잉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 그림이 될 수도 있고 알아보기 힘든 필기체의 문장이 될 수도 있다. 애초에 잉크를 각기 다른 색으로 채웠다면 종이에 남겨진 기록의 색도 아예 다를 것이다. 만년필을 가지고 있고 잉크를 채웠다는 사실에만 뿌듯해 하며 만년필만 바라보지 말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쓸 것인지 생각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시간이 흘러 배운 것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보고 다시 생각해보고 어떤 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나눠주는 행위가 아닐까.

무엇을 쓸 것인가 생각하며 잉크를 채우는 기대에 찬 기쁨은 펜촉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잉크들의 흔적을 위한 것이지 잉크를 채웠다 비우는 행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잉크를 조금씩 채워보고 그것으로 내가 무엇을 쓰는지, 무엇을 그리는지 생각해보는 것. 그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나눠서 보고 서로 의견을 나누어 보는 일. 그것이 만년필의 궁극의 지향이다.

손으로 쓴 글씨가 아니라 자판을 두드려 입력하는 것이고, 과도하게 계몽적이고 지나치게 '선생이라는 직업이 가져온 직업병에 가까운 글'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 글을 남기기로 한다. 다른 사람들과 나눠서 보고 서로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 그것이 만년필 예찬으로 여겨진다 할지라도. 




2012년 10월 3일 수요일

<광해, 왕이 된 남자>

닮은 얼굴의 두 남자가 있다.

한 명은, 자신의 자리와 외부의 위협 때문에 불안한 임금, 광해.
그리고 또 한 명은 탈을 쓰고 임금을 우스개거리로 삼아 먹고 살던 광대 하선.

하선은 탈을 써야만 임금의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궁에 들어간 이후 그는 비로소 탈을 벗고 맨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까지 그가 본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도 탈을 벗게 된 궁에서부터이다.

탈이란 물건은, 써보면 알겠지만 뚫려 있는 구멍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시야가 좁아 보이는 물건이다. 궁에 들어오기 전까지 하선의 생활은 그저 보이는 대로 살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만 보던 세상이었다. 탈, 혹은 가면이라는 물건은 일반적으로 무엇인가를 가리는 데 사용되는 것이지만 어쩌면 세상은 그냥 돌아가는 대로 있었는데 그것을 보는 사람이 쓴 가면 때문에 좁게, 다르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선은 궁이라는 배경 속에서 사회적인 역할극의 한 역할을 맡는 것으로 자신의 새로운 생활을 본의아니게 시작하게 되었다. 궁에 들어가 자신의 맨얼굴로 임금 역할을 하면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물론 그의 모습은 "임금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이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임금의 명이 법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으며 그것 또한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위험에 빠진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 것인지 그도 잘 안다.

맨얼굴로 마주한 세상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서로 죽고 죽이며 살지 않는 것. 그가 현명하게 결정한 것처럼 자신의 꿈은 자신이 꾸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맨얼굴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두려운 확신. 그는 이제 더 이상 탈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선은 자신의 맨얼굴로 떠나고 도승지 허균은 멀어져가는 배가 보이는 포구에서 그에게 진심어린 예를 갖춘다. 인간의 얼굴을 마주할 때 보일 수 있는, 도승지가 '천한 것'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를 갖추고 그를 보내는 것이다.

탈을 쓰고 마주하던 세상과, 맨얼굴로 보는 세상이 본디 다른 세상은 아니겠지만 경험적으로는 다른 세상이다. 그 탈을 벗을 것인지 그 탈 뒤에서 세상이 무엇인가는 보지 않고 살아갈 것인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하선에게는 목숨까지 걸어야 할 정도의 선택이기는 했지만.


2012년 5월 30일 수요일

비정상적 다수의 힘을 경계함

어제, 최근 여수 엑스포를 다녀온 친구과 이야기를 나누다 '등산복 차림의 중년 여행객'들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했다. 나도 여수 엑스포 현장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화면에서 '등산복 차림의 여행객'을 꽤 많이 보았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관광지에서 마주칠 수 있는 화려한 등산복 차림의 관광객들. 같은 지역 모임이거나, 동창들이거나 혹은 어떤 다른 집단이건간에 그들을 마주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한 순간에 식당의 방 전체를, 관광지의 매표소를, 고속도로의 휴게소를 '장악한다.'

집에서 가깝고 길이 험하지 않다는 이유로 요즘 자주 가는 북한산 둘레길에서도 고급장비와 복장을 갖추고 팀을 이룬 '여행단'을 쉽게 본다. IMF 이후 직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한국의 아웃도어 시장도 커졌다고 하는데, 이제는 등산이나 캠핑뿐 아니라 그저 집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아웃 도어" 상황에서 화려한 등산복들은 일상복이 되었다. 등산복으로 무장한 중장년의 모습은 여행지에서, 일상에서 다수가 되어버렸고 사람들의 일상에서 '정형화된(stereo-typed)' 이미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등산복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기능적으로 괜찮은 옷이어서 일상에서의 활용도가 높을뿐 아니라, 그저그런 일상에서 등산복으로 뽐내보고 주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 쯤 입어보고 싶은 마음을 탓할 수는 없다.

오늘 아침 신문을 읽다가 칼럼을 하나 보았다. "'스카이' 국회"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서울대 동창회보 5월호에 실린 '제19대 국회의원에 동문 132명 당선'이라는 기사에서 출발한 글이다. 전체 의원 300명 중 44%인 132명이 특정 학교 출신인 것이다. 서울대, 연대, 고대 동문으로 19대 국회에 당선된 사람이 최대 270명(90%), 중복되는 사람들을 한 대학 출신으로만 쳐도 205명(68.3%)에 달한다고 한다.

(서울대 동창회보에서 캡쳐한 사진)
한겨레 칼럼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것은 무척 비정상적이다. 어떤 사회집단에 특정 학교 출신들이 60%이상 포진하고 있고, 달리 보면 90% 정도의 사람들이 어떤 방식의 연망이든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무섭기까지 하다.

예전에 다른 상황에서 자주 예를 들었던, 80년대 말에서 90년대까지 서울대에서 활동했던 성소수자 모임 "마음 001"이 생각난다. (현재는 큐이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마음' 뒤의 숫자는 "100명 중 성소수자에 대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수"라는 의미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006, 008 정도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약 '마음 050' 같은 상황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마음 060' 정도가 될 수 있었다면? 001의 시절과는 아주 다른 양상으로 '소수자'라는 표현은 떼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다수가 이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소수자들을 '비정상'에 몰아 넣었던 이상한 논리의 시대에 살았던(지금도 살고 있는) 상황을 인지한다면, 한 집단 안에 특정 이해관계의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충분히 두렵다. 자신들의 얽히고 섥힌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배제하거나 소외시켜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믿고 살겠지.

다수가 힘을 모아 소수를 자신들의 경계 안으로 포섭하거나 배척하는 일은 중국의 한족과 소수민족의 역사적 관계에서도 충분히 목격한 바 있다. 다수가 힘을 모아 소수를 '비정상'이라고 낙인찍는 것이 이상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요인 때문에 한 집단에 이런 과도한 다수가 포진하는 사실도 충분히 비정상적이다.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게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불편한 진실)

숫자가 많다고 그 내부의 다양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가정하지는 않는다. 특정 학교 출신이라고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은 분명 아닐테니. 하지만 숫자가 힘이 되고 폭압이 되고 권력이 되는 순간이 없을 것이라 장담하기는 어렵다. 산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현란한 색의 등산복 무리는 수가 많지만,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그냥 점점 정형화된 이미지가 강해질 뿐. 하지만 국회라는 '힘의 조직' 안에 다수를 차지하게 되는 '힘', 한국사회에서 학벌이 가진 위력이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학벌로 똘똘 뭉친 '힘있는 집단'이 만들어지는 것은 위협적이다.

네 개의 언론사가 거의 100일 이상, 어떤 경우는 1년 가까이 파업 중인데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사회(<나가수> 신정수 PD도 1인 시위에 나섰다는 기사들 1, 2). 위장전입 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용인되는 사회. 여러 가지로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상황에 비정상적인 상황이 하나 더해진 것쯤으로 전반적인 상황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아,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그 비정상성의 상황이 너무 크다.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문제이니 새삼스럽고 유별나게 굴지 말라고 하기에는 그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져 버렸다.

2012년 5월 7일 월요일

2012년 어버이날을 앞둔 장인어른의 편지


어제, 그러니까 2012년 5월 6일, 처가 식구들이 모여 어버이날 행사를 미리 당겨서 했다. 중국식 훠궈로 점심을 먹고 커피와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 그리고 창경궁 산보.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오늘 장인께서 메일을 보내셨다. 어제의 일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메일의 뒷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어 보내셨다.

--------------

부모님에 대한 효

너희들 3남매 각자 딸린 식구들의 건강이다.

제일 효도하는 길 건강하게 지내주는것이야.....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진료 받아 확인하고 가자

그냥 괜찮겠지 하지말고

예령에 민감하게 대처하면 절대로 심각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아버진 회사 일도 내 건강도 그렇게 지키고 실행하며 오늘에 살고있다.

생활의 첫째는

건강 지키는것을 삼도록 해라

건강 다음이 돈이야..

우리가정에 좋은일만 있게 노력하자

화이팅 !!!!!!!

아버지가 어버이 날에 부친다.

-----------


화이팅이라는 힘찬 구호.
그리고 "아버지가 어버이날에 부친다"라는 마지막 문장.
자식들 스스로 건강을 챙기는 것이 효라고 하시는 말씀.

당신도 요즘 옛날같지 않은 몸이신데 자식들 건강 챙기시는 모습에서 "의연함"을 읽어낸다고 쓰면 너무 버릇 없어 보일 것 같지만, 나는 장인어른의 그 '의연함'이 좋다. 당신이 힘드신 것은 가급적 내색하지 않으시는 그 의연함.

부디 건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