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가깝고 길이 험하지 않다는 이유로 요즘 자주 가는 북한산 둘레길에서도 고급장비와 복장을 갖추고 팀을 이룬 '여행단'을 쉽게 본다. IMF 이후 직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한국의 아웃도어 시장도 커졌다고 하는데, 이제는 등산이나 캠핑뿐 아니라 그저 집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아웃 도어" 상황에서 화려한 등산복들은 일상복이 되었다. 등산복으로 무장한 중장년의 모습은 여행지에서, 일상에서 다수가 되어버렸고 사람들의 일상에서 '정형화된(stereo-typed)' 이미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등산복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기능적으로 괜찮은 옷이어서 일상에서의 활용도가 높을뿐 아니라, 그저그런 일상에서 등산복으로 뽐내보고 주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 쯤 입어보고 싶은 마음을 탓할 수는 없다.
오늘 아침 신문을 읽다가 칼럼을 하나 보았다. "'스카이' 국회"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서울대 동창회보 5월호에 실린 '제19대 국회의원에 동문 132명 당선'이라는 기사에서 출발한 글이다. 전체 의원 300명 중 44%인 132명이 특정 학교 출신인 것이다. 서울대, 연대, 고대 동문으로 19대 국회에 당선된 사람이 최대 270명(90%), 중복되는 사람들을 한 대학 출신으로만 쳐도 205명(68.3%)에 달한다고 한다.
(서울대 동창회보에서 캡쳐한 사진) |
예전에 다른 상황에서 자주 예를 들었던, 80년대 말에서 90년대까지 서울대에서 활동했던 성소수자 모임 "마음 001"이 생각난다. (현재는 큐이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마음' 뒤의 숫자는 "100명 중 성소수자에 대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수"라는 의미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006, 008 정도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약 '마음 050' 같은 상황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마음 060' 정도가 될 수 있었다면? 001의 시절과는 아주 다른 양상으로 '소수자'라는 표현은 떼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다수가 이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소수자들을 '비정상'에 몰아 넣었던 이상한 논리의 시대에 살았던(지금도 살고 있는) 상황을 인지한다면, 한 집단 안에 특정 이해관계의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충분히 두렵다. 자신들의 얽히고 섥힌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배제하거나 소외시켜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믿고 살겠지.
다수가 힘을 모아 소수를 자신들의 경계 안으로 포섭하거나 배척하는 일은 중국의 한족과 소수민족의 역사적 관계에서도 충분히 목격한 바 있다. 다수가 힘을 모아 소수를 '비정상'이라고 낙인찍는 것이 이상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요인 때문에 한 집단에 이런 과도한 다수가 포진하는 사실도 충분히 비정상적이다.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게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불편한 진실)
숫자가 많다고 그 내부의 다양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가정하지는 않는다. 특정 학교 출신이라고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은 분명 아닐테니. 하지만 숫자가 힘이 되고 폭압이 되고 권력이 되는 순간이 없을 것이라 장담하기는 어렵다. 산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현란한 색의 등산복 무리는 수가 많지만,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그냥 점점 정형화된 이미지가 강해질 뿐. 하지만 국회라는 '힘의 조직' 안에 다수를 차지하게 되는 '힘', 한국사회에서 학벌이 가진 위력이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학벌로 똘똘 뭉친 '힘있는 집단'이 만들어지는 것은 위협적이다.
네 개의 언론사가 거의 100일 이상, 어떤 경우는 1년 가까이 파업 중인데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사회(<나가수> 신정수 PD도 1인 시위에 나섰다는 기사들 1, 2). 위장전입 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용인되는 사회. 여러 가지로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상황에 비정상적인 상황이 하나 더해진 것쯤으로 전반적인 상황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아,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그 비정상성의 상황이 너무 크다.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문제이니 새삼스럽고 유별나게 굴지 말라고 하기에는 그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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