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6일 금요일

좀비와 역사

"군에서는 좀비들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지도 말고, 좀비가 되기 전에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쩌다 여기 오게 됐는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상상하려 들지 말라고 했죠. 나도 알아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요, 그렇죠? 이 좀비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궁금해지잖아요? 이건 마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는 것과 같잖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상상력이 발동하는건데. 그런데 바로 그때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대충 적당히 하면서 경계를 푸는 사이에 결국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면서 왜 이런 신세가 됐을까 궁금해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리죠. ..." (맥스 브룩스 2008 [세계대전 Z], 서울: 황금가지. 287쪽)

(by Cross-stitch ninja, flickr.com)


좀비는 인간이 마주치는 순간 뇌를 박살내 처치해야만 하는 대상일 뿐이다. 처치 후 숨 돌릴 틈이 있다면 좀비가 되기 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쩌다 좀비가 되었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뇌가 박살나버린 좀비 시체 앞에 서 있는 그 순간이라면 불가능한 가정이다. 피하거나 숨거나 도망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떻게 좀비가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은 같은 위험에 처했을 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빠져나갈 대안을 알려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와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바쁜 상황에서 남의 사정까지 돌볼 여유는 없다.

좀비는 그것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과거가 삭제된 존재'이다(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경석의 <좀비의 시간2>는 과거의 시간이 어떻게 현재의 좀비를 움직이게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모래인간의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경우도 인간인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사는 좀비들을 보여준다). 오로지 현재만 있는 존재. 누군가를 공격해서 그 살을 뜯어야만 자신이 생존할 수 있다는 현재적이고 즉시적인 존재가 바로 좀비이다. 애써 그들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정당성을 그와 마주한 상대에게 주고, 그들의 과거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는 것이 나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시도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좀비이다.

뒤집어서 다시 이야기해보자. 그렇다면, 좀비가 아닌 존재와 마주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생각하는 것은 필요하고 정당한 일이 된다.

그것이 우리가 좀비가 아닌 인간을 마주할 때 역사를 생각하는 이유이고 논리이다.

우리의 현재적 삶이, 인간의 현재 모습이 오랜 시간의 흐름과 깊이에 의해 형성된 결과이자 과정이라고 할 때 상대가 좀비가 아닌 이상 그 시간의 흐름을 돌이켜 생각할 여유 정도는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준비하고' 따위의 뻔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와 시간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을 대하는 도리의 한 측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것이 좀비가 아닌 인간을 대하는 예의라는 생각도 들어서이다.

누군가에게 있었던 아픔의 시간을 그저 지난 일이라고 쉽게 잊지는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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