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현대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들이 청년 대신 청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면서 음악의 영역에서 70-80년대에 필적할 청년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대략 청춘이라는 용어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20대들이 즐기고 좋아하는 소위 '문화적 장르'는 무엇일까? 그 시절 <쎄시봉>이나, 남진, 나훈아처럼 현재의 젊음을 상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70년대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 남진과 나훈아, 80년대 산울림, 송골매, 조용필, 그리고 뒤 이어 김광석, 이문세 등이 담당했던 역할을 지금의 대중문화 영역에서 찾는다면 누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가 '청춘'이라 부르는 세대의 대표적 상징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중문화 시장을 장악한 아이돌에 대한 열광은 10대의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비생산적 혹은 잉여적 삶으로 치부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20대가 되면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로 숨어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롤(League Of Legend)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것들은 ('팬질'과 유사한 이유로) 그다지 자랑할만한 일이 되지 않는다. 고군분투하고 열정을 드러내며 아파도 참아야 하는(!?) 청춘들에게 노는 일은 '잉여들이나 하는 짓'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감춰야 할 것이지 자랑삼아 드러내기는 어려운 일이 되었다.
어쩌면 청년이라는 용어대신 청춘이라는 용어를 갖게 된 것이 세대의 특징을 잃어버린 것의 표식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봄이라는 비유를 통해 '청춘'이 타자들에 의해 재현되는 순간부터 그들의 '상태'는 누구나 겪는 것, 지나가면 추억거리가 될터이니 지금은 각자 잘 알아서 견뎌야 하는 환상으로, 열정과 낭만이라는 허울의 포장으로만 남겨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청춘'은 스스로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 존재로만 여겨지고 그들의 현실은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일이 아니라 그들 자신만의 문제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특징을 상실한 것이 그들의 책임인가?
그런데 그 특징을 상실한 것이 그들의 책임인가?
모두가 거쳐야 하거나 거쳤던 상황이지만 연속성은 단절되고 하나의 상태로만 뚝 떼내어져 그들 자신이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단계에 놓인, 청춘이라는 이름의 청년들. 사회에 의해 주어진 시련과 아픔이지만 정작 그에 대한 처방은 스스로 해야 하는 현실 속의 존재들. 이 존재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듣고 싶었다. 이번 학기 교양 수업에서 학기 후반에 청년에 대해 다루기로 한 것은 그 이유였다. (아래에서 파란글씨의, 들여쓴 문단의 글들은 수업에서 학생들이 쓴 것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발췌는 문맥의 희생을 필연적인 대가로 삼지만 그 절절함을 고스란히 전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행위이다.)
오래 전 이 블로그에서 썼던 것처럼, 어릴 때 각자의 꿈은 다양했었는데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오로지 하나의 꿈, 즉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 남는다.
살아가는 모습으로서의 문화를 다루는 교양수업에서 청년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던 것은, 아프리카 부시맨이나 아마존 열대우림의 부족이나 중국의 소수민족을 다루는 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도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입이 아닌 청년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럴듯한 대답은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 밖의 시선으로, 나의 어설픈 경험으로 프레임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꼰대들 어법은 이것이다: “나도 그만할 때 더 심한 어려움을 겪고 여기에 온거야. 그러니 엄살피우지 마. 젊을 때는 원래 그런거야.” 그리고 덧붙인다. “그러니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해라’ 혹은 ‘힘내’라는 말처럼 무책임한 말은 없다. 결국 잘못되거나 실패할 경우 그 책임은 ‘열심히 하지 않은 자신’ 혹은 ‘힘내지 않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힘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이다. 자기계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을 개인에게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럴듯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열심히 해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열심히 하자”는 말은 하고 싶다. 어두운 동굴이라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여럿이 앞뒤로 손잡고 가는게 그나마 낫지 않은가.
오래 전 이 블로그에서 썼던 것처럼, 어릴 때 각자의 꿈은 다양했었는데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오로지 하나의 꿈, 즉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 남는다.
대학은 우리에게 마치 약관동의처럼 군다. 동의해야만, 선택해야만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면서 말이다. 우리는 방법이 없다. 선택하는 수밖에. (김**)대학에 들어오면 '넓게 생각하고 폭넓게 배우는 것'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취업'이라는 단 하나의 꿈을 강요받는다. 이 과정에서 '자기계발'이라는 포장은 모든 것을 개인의 역량에 맡기며 경쟁을 정당화한다. 열정페이와, 미래를 알 수 없는 '자발적 피착취'의 전형인 대외활동과 인턴 역시 '자기계발'의 과정이고 자기 노력의 산물이(라고 각인된)다. 자기계발서들은 '긍정에 대한 강박'을 만드는데, 긍정에 대한 강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안 좋은 상황이나 문제들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도록 한다는 점에서 외부의 문제를 문제로 지적하기보다는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에 대해서는 이원석 2013 [거대한 사기극: 자기계발서 권하는 사회의 허와 실](북바이북)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지도 않은 미래에 치여 산다. 나보다 뒤에 있는 과거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앞서있는 미래에 쫓긴다. 내가 정해놓은 미래가 다가오기 전에 해야만 한다고 일컬어지는 일들을 해내야 한다. 몇 살 전에는 어학연수를 갔다 와야 하고, 몇 살 쯤에는 인턴을 해야 하고, 취업이 되어 있어야 한다. 대학생의 생활은 자신을 다 담지도 못하는 자기소개서를 벗어날 수 없다. (조**)
초등학교 때에는 하면 즐거울 일을 꿈으로 삼았지만 대학생이 되어서는 하면 덜 괴로운 일을 꿈으로 갖게 되었다. 그리고 포기에 익숙해져버렸다. (권**)
대학교는 힘들었다. 생각했던 푸르른 나날보다 까만 날들이 더 많았다. 대학 생활은 돈과 사랑을 포기해야 얻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돈을 얻으려면 대학과 연애를 포기하면 됐고, 연애를 얻으려면 돈과 대학을 포기하면 됐다. 셋 다 가지고 싶었던 나는 알바도, 연애도 놓지 않았다. 물론 학업도. 그래서 얻은 건 하나였다. 병. 몸과 마음의 병. 사람들은 그걸 젊음의 흔적, 청춘의 표식이라고 그럴싸한 포장지를 둘러주었다. (황**)
무엇을 내어줘야지 이 끔찍한 물질만능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을 수 있을까, 무엇을 내어줘야지 난 내 꿈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 영혼과 자존심을 다 내걸어도 힘들 것이다. 평생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지만, 지금의 청년들의 삶은 좋아하는 것 하나를 이루기에도 벅차다. (송**)사회는, 그리고 '기성세대'는 '청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의 상당수는 청년들의 삶의 가운데에 서서 함께 세상을 보려 하지않고 '나도 한 때 그랬지'라는 경험적 오만의 표정을 지닌 채 외부에서 이야기하려 한다. 나도 예전에 트위터에 이렇게 썼던 적이 있다: "이십대에서 발견되는 다양성을 무시하고 그들을 프리터족, 니트족, 캥거루족 등의 단일한 용어로 묶어내는 것은 이십대를 설명하려고는 하지만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는 시도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정작 자신은 한 번도 아파본 적 없는, 삶에 굴곡이라곤 없었을 것 같던 약력의 이름난 교수가 그런 이름으로 책을 냈다. 책은 베스트셀러라는 명칭을 얻어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전 세계 수십, 수백, 수천만의 아픈 청춘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나도 그 아픈 청춘들 중 하나였다. 책에서 얻고자 한 건 내가 왜 이렇게 아픈지, 내가 왜 이렇게 힘든 건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지만, 책은 나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말했다. ‘네 탓’ 이라고. 아마 그 책을 산 사람들은 덧난 상처에 바를 약을 찾고 싶었던 것 같은데, 후시딘이 아니라 물파스를 산 것 같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아픈 청춘들은 마음 한 구석이 쓰라리고 또 쓰라렸다. (황**)
한국 사회에서의 청년들은 기성세대라는 수많은 관객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외줄의 중간에 위태롭게 서있다. 무섭다고 뒤로 물러서면 “젊은이니까 더 거대한 꿈을 키워야한다. 꿈꾸지 않는다면, 돌아오지 않을 젊음을 낭비하는 것이다”라며 관객들에게 야유를 받을 것이고, 무서움을 이겨내 앞으로 나아가 보아도 “그것은 현실성이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만둬라”라며 오히려 더 호되게 관객들에게 야유를 받게 된다. (권**)청년들 자신이 정의한 청년은 "성장하지 못하더라도,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사회에 맞춘 삶 속에 청춘은 없다. 청춘, 봄이라더니 세상에 꽃 한 송이 피지 않은 봄은 없다. 남들이 그렇게나 청춘이라던, 그래서 부러워하던 스물 한 살의 중반에 서있는데, 나는 그렇다. 잡초라도 무성하게 자라면 날이라도 풀렸구나 할 테지만 아직까지 현실은 민둥산이 내 전부이다. 남들도 이럴지도 모른다. 물론 아닌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다들 꽃핀 봄을 웃음으로 지내고 있었으면. 언젠간 버티다가 보면 꽃은 필 거라고 생각한다. 가시뿐이라고 믿었던 선인장도 오래고 더딜지도 모르지만 언젠간 꽃은 피니까. 이외수가 그랬다. 존버 정신. 그냥 엄청나게 버티는 게 청춘의 전부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버티는 건 젊음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니까. (황**)한국사회는 청년들의 희생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근간이 된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 희생이 청년들 자신의 미래를 위한 자원이 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근저에 깔린 생각이다.
살아가는 모습으로서의 문화를 다루는 교양수업에서 청년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던 것은, 아프리카 부시맨이나 아마존 열대우림의 부족이나 중국의 소수민족을 다루는 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도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입이 아닌 청년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럴듯한 대답은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 밖의 시선으로, 나의 어설픈 경험으로 프레임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꼰대들 어법은 이것이다: “나도 그만할 때 더 심한 어려움을 겪고 여기에 온거야. 그러니 엄살피우지 마. 젊을 때는 원래 그런거야.” 그리고 덧붙인다. “그러니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해라’ 혹은 ‘힘내’라는 말처럼 무책임한 말은 없다. 결국 잘못되거나 실패할 경우 그 책임은 ‘열심히 하지 않은 자신’ 혹은 ‘힘내지 않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힘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이다. 자기계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을 개인에게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럴듯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열심히 해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열심히 하자”는 말은 하고 싶다. 어두운 동굴이라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여럿이 앞뒤로 손잡고 가는게 그나마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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