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 외방선교회 소식지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2015년 여름 호(통권 97호) "문화 이해하기"에 쓴 글입니다. 게재된 글은 한국외방선교회 홈페이지(http://www.kms75.or.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철학자 마크 롤랜즈는 11년 동안 늑대와 함께 살았다. 보름달이 뜬 날 구슬프게 우는, 덩치가 산만 하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무장한, 번뜩이는 눈을 가진 바로 그 늑대 말이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소설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처럼 늑대소년으로 자랐다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개를 키워왔던 경험이 있던 그는 브레닌이라는 이름의 늑대를 새끼 때부터 키우기 시작해 11년 동안 함께 살았다. 그는 자신이 쓴 [철학자와 늑대](2012, 추수밭)라는 책을 통해 늑대와 함께 산 이야기와, 늑대가 죽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삶을 상대화한다. 늑대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을 바라보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며 인간의 삶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에 묶여 있는 존재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좇는 존재이다. 우리 삶의 의미와 삶의 끝은 시간의 선을 한참 따라 내려간 후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의 선은 우리를 매혹시키기도 하고 공포에 떨게도 한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고통이다.” (280쪽)
신을 제외한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삶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어떤 상태이다. 마크 롤랜즈가 쓴 것과 같이 삶이라는 시간의 선을 끝까지 따라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것이 죽음인데 그 선의 끝이 도대체 어디인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그 끝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선을 따라가는 여정은 어느 순간부터 두려운 길이 된다. 게다가, 그 끝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는 어떤 살아있는 인간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은 증폭된다. 미지의 것은 항상 두려운 법이니까.
셸리 케이건은 ‘죽음은 왜 나쁜가?’라는 질문에 대해 “죽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존재는 왜 나쁜 것인가?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있으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좋은 것들을 죽고 나면 하나도 누릴 수 없다.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했다([죽음이란 무엇인가], 서울: 엘도라도, 304쪽). 마크 롤랜즈 역시 “죽음은 우리로부터 미래를 박탈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고 했다. 미지의 상태이고 예측할 수 없고 삶의 여러 가능성을 빼앗는 죽음은 인간에게 두렵지만 피할 수는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죽음이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미지의 것, 설명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는 무엇일 뿐이라면 그것은 너무 두렵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고 그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낸 성긴 조합이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문화라 부른다면, 죽음과 같은 미지의 상태를 설명 가능한 영역으로 만드는 데에도 문화가 작동한다. 거의 대부분의 사회에서 죽음이라는 미지의 상태를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의미들을 부여하여 이해 가능한 영역으로 만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자신들의 문화적 체계 안에 포용하여 그 역시 살아갈만한 어떤 것으로 만드는 시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죽음을 다루는 문화적 태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중국, 라오스 등에 있는 몽족의 언어에서 태반을 가리키는 말은 ‘저고리’라는 뜻이다. 몽족 중 누군가가 죽으면 그 혼은 자기가 살아온 곳을 되짚어 올라가 저고리인 태반이 묻힌 곳까지 가서 그것을 입어야 한다. 태어날 때 입었던 옷을 다시 입어야만 혼이 길을 떠날 수 있다. 죽은 사람의 혼이 자기 저고리를 찾지 못하면, 그 혼은 영원히 벌거벗은 외톨이로 이승을 떠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면 태반을 잘 묻어야 한다. 몽족에게 죽음에 대한 준비는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티베트에서는 조장(鳥葬) 혹은 천장(天葬)이라 부르는 방식의 장례가 있다. 망자의 시신은 웅크린 자세로 흰 천에 싸고 포대에 넣어 장례 의례가 거행될 장소로 운반된다. 그곳에서 천장사들의 손에 들린 도끼와 칼, 망치 등으로 잘게 쪼개져 독수리, 까마귀 등에게 ‘보시’된다. 새가 깨끗하게 먹어야 영혼이 잘 환생한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토라자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을 앉은 자세로 고인돌에 모시고 몇 년 후에 장례를 치르기도 한다. 저승 가는 길에는 소의 영혼을 타고 가야 하는데 남은 가족들이 충분한 소를 모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망자의 영혼을 저승에 모실 충분한 소를 모으면 그제서야 장례를 행한다.
다양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을 다루는 다양한 문화적 태도들의 사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의 수만큼 많으니 여기에서 이를 모두 소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례를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사회의 장례에서 나타나는 유사한 속성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장례는 떠나보냄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만남이기도 하다. 고인의 과거와 남은 사람들의 현재가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조상신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고인이 남긴 흔적과 고인이 부재한 앞으로의 나날들이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장례는 죽음을 개인의 차원에서 사회의 차원으로 이전시킨다. 개인의 미래는 끝났다 할지라도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 그것이 장례가 하는 일 중 하나이다. 많은 사회의 장례에서 죽음을 죽음에 머물도록 하지 않고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새로운 세상에서의 태어남으로 설명하려는 문화적 장치들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인도네시아 토라자의 장례 과정에서 돌아가신 분을 ‘앉은 자세’로 고인돌에 모시는데 이는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의 자세와 유사한 것으로, 이 세상의 삶은 끝났지만 저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에서도 돌아가신 수도승을 장례할 때 앉은 자세로 관에 넣고 화장하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이다.
죽음과 삶, 삶과 죽음의 교차는 숫자로도 표현된다.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3과 7은 각각 삶과 죽음을 상징한다. 이마무라 쇼헤이(今村 昌平) 감독의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1983)는 시대를 알 수 없는 일본의 어느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영화이다. 이곳은 먹을 곳이 귀한 곳인데 70살이 되면 산 채로 나라야마라는 곳에 가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마을의 규약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이를 어길 수는 없다. 영화에서 70세가 된 어머니 오린을 맏아들인 다쓰헤이가 나라야마로 모셔야 하는 때가 되었을 때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 모자(母子)를 불러 놓고 나라야마에 가는 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라야마로 가는 길은 뒷산기슭을 돌아 세 번째 산을 지나면 연못이 하나 나온다. 연못을 세 번 돌아 계단을 오른다. 산을 하나 넘으면 깊은 계곡이 나온다. 그 계곡을 지나는 길에 일곱 번 도는데, 거기를 일곱 골짜기라 한다. 일곱 골짜기를 지나면 나라야마 길이 나온다. 길이 분명하게 보이진 않지만 계속 올라가다보면 신이 기다리고 계신다.” 여기에서 반복되는 숫자는 3과 7이다. 산 사람들의 공간인 마을에서 출발할 때는 3이라는 숫자가, 죽은자들의 공간인 나라야마에 가까이 갈수록 7이라는 숫자가 사용된다. 나라야마와 마을을 잇는 길은 산자와 죽은자가 공존하는, 혹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3과 7의 변주를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민간신앙에서 아이를 점지해주는 신은 삼신할매이고 수명을 관장하는 것은 칠성신이라는 설명 역시 이 숫자들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준다. 불교에서 49재는 7이 일곱 번 반복되는 것으로 그 이후에는 망자가 완전히 저세상으로 가는 것으로 의미화된다. (중동 지역은 40이라는 숫자가 성(聖)과 속(俗)의 전이기간을 상징한다고 한다.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한 것 역시 이런 상징적 의미 안에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은 3으로, 죽음은 7로 상징되지만 예외가 있다. 주호민의 웹툰 <신과 함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저승사자’는 세 명이 함께 다닌다. 동남아시아 몽족들의 장송곡에서 망자가 거쳐야 할 여정은 모두 (3의 배수인) 9개이고 지나가야 하는 문의 수는 모두 3개이다. 가는 길에 ‘돌을 먹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데 망자는 이 괴물을 제어하기 위해 괴물의 입에 3개의 실로 된 공을 던져야만 한다. 그래서 후손들은 망자를 위해 3개의 실타래 공을 준비한다. 죽음과 관련된 상황에서 7이라는 숫자대신 생명과 관련된 3이라는 숫자가 사용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끝나지만 저 세상에서의 삶이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환생이거나 영생이거나 윤회이거나 부활 등의 개념으로 제시된다.
죽음에 대한 문화적 관념들은 다르지만 죽음을 다루는 의례와, 이를 설명하는 문화적 태도들에서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죽은자에 대한 애도와 산자에 대한 위로가 바탕이 되고 의례를 통해 표현된다는 점이다. 15세기에 그려진 <세 명의 살아있는 자와 세 명의 죽은자>라는 그림에서 죽은자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현재 당신들의 모습이 과거 우리의 모습이었고, 현재 우리의 모습은 미래 당신들의 모습이지요”라고 말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 존재의 숙명이라면 죽음은 다른 누군가의 문제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다른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공감해야 할 가치를 갖는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날은 2015년 4월 16일이다. 정확하게 1년 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죽음을 갑자기 맞게 된 295명과 아직도 차가운 바다 속 어딘가에 있을 9명의 ‘억울한 죽음’은 여전히 설명되지 않았고 그들의 남은 가족들은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1년 전 그날이 365번 반복되는 날들을 지내고 있다.
공감에 기반한 죽음에 대한 예의. 2015년 4월 한국사회에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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