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1일 화요일

감히, 문화를 말하다

(이 글은 한국 외방선교회 소식지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2015년 봄 호(통권 96호) "문화 이해하기"에 쓴 글입니다. 게재된 글은 한국외방선교회 홈페이지(http://www.kms75.or.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문화가 넘쳐난다, 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새로운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문화'라는 단어는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다. 백화점에도 '문화' 강좌가 있고 신문과 방송 등의 미디어에서도 '문화가 산책'이나 '문화면' 등의 이름을 걸고 소식을 전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문화가 있는 날'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공연이나 행사 입장료를 할인해 준다. '문화인은 질서를 지킵니다' 라는 문구도 예전에는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 영화나 예술공연을 보고 나오면 '문화생활 잘 했다'라거나 혹은 '가끔 문화생활을 하면 삶이 윤택해지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문화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걸로 봐서는 문화라는 용어에 썩 익숙한 것도 같은데 막상 문화란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대답하기 퍽 어려운 걸 보면 우리는 문화라는 용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문화라는 것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었던 영역이었을 수도 있겠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의미로 문화라는 용어를 정의해왔지만 이 시리즈를 통해 앞으로 이야기할 문화라는 용어는 글의 서두에서 들었던 사례들과 같이 예술이나 공연, 여가나 오락 활동 등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명확하게 정의하지는 못하겠지만 많은 인류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문화라는 용어를 '특정 사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넓은 의미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의 사례만 가지고 거칠게 이야기하면, 한국 사회에서 한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일본에서 아이누족이 자신들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 영국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식, 브라질의 한 빈민지역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들이 각각 다른 층위에 있기는 하지만 각각이 모두 특정한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화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살아가는 방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차원만을 문화라고 부른다면 그리 많은 정의가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문화는 단순히 관찰을 통해 알 수 있는, 외면적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그 사회의 맥락에서 적합하게 여겨지는 논리적인 질서를 만들어내는 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틀은 개인이 혼자 우긴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폭과 삶의 경험 속에서 그 사회의 성원들이 어느 정도 공통적으로 갖게 된 것이고 오랜 세월을 거쳐 수정되고 변형되면서 동시에 축적된 것이다.
특정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논리를 문화라는 틀을 통해 부여한다. 아프리카 Suri족 여성들의 치장은 다른 문화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보기에는 낯설고 이상하지만 그들 자신이 규정하는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시각화하고 설명하는 틀이 된다. 춘절, 그러니까 설날이 오기 전 중국 사람들이 터뜨리는 폭죽은 액을 막는 것이고 정월 초나흗날에 터뜨리는 폭죽은 재물신을 맞이하는 폭죽이다. 힌두 사람들에게 소는 신이 내린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동물이며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원칙에 입각해 처리한 식재료만을 먹기 때문에 그들이 먹지 않는 돼지고기와 같은 음식을 강요하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질서의 체계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자신의 책 <야생의 사고> 앞부분에서 러시아의 여러 부족들이 몸에 어떤 병이 있을 때 먹을 수 있는 약재를 소개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야쿠트족의 경우 치통이 있을 때에는 딱따구리 부리가 약재로 쓰인다고 한다. 여기에서 딱따구리 부리와 치통을 연관시키는 것은 그것이 실제 치료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딱따구리 부리와 인간의 이가 '서로 어울린다'고 보는 관점을 갖고 있느냐의 여부이다.
문화는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이며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몸에 익혀 살아가는 것인데 자연적 환경, 역사적 배경, 그 외의 여러 다른 요소들로 인해 각각의 사회는 다른 사회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각각의 사회에서 밥을 먹는 방식,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그렇지 못한 음식 등은 무척 상이하다. 유대인이나 무슬림들에게 돼지고기는 '불결한 음식'이며 중국에서 대부분의 식당에 다 있는 비둘기고기나 개구리는 현재의 한국에서는 거의 먹지 않는다. 어떤 사회에서 동물의 피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반면 다른 사회에서는 절대로 먹지 말아야 할 것으로 분류된다.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 닭요리를 주문하면 머리가 붙어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한 마리를 온전하게 요리했다는 의미이다. 또한 음식에 대해 느끼는 바 역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이 '맛있다'고 표현하는 떡볶이나 양념통닭 같은 음식들에 대해 중국의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맵다'고 반응하는 반면 쓰촨(四川)이나 후난(湖南) 같은 지역 사람들은 '싱겁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또한 쓰촨 사람들이 '맛있다'고 표현하는 음식을 한국 사람들이 먹으면 대개는 '맵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중국음식에 기름을 많이 쓰는 걸 보면 한국 사람들은 '느끼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반면 중국 사람들은 '고소하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내용과 형식도 상이하고 세상의 시작을 설명하는 신화도 각기 다르다. 옷을 입는 방식, 말하는 방식, 치장하는 방식,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등도 사회마다 문화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이런 '다름'으로 인해 각각의 문화에서 가치있게 여기는 대상이나 특성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몸에 대한 '평가'를 이야기할 수 있다. 모든 사회가 이상적인 체형과 체격에 대한 문화적 기준이 있다. 한국의 경우 여성들에 대해 마른 몸을 상대적으로 '예쁘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한 반면 니제르에서는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통통한' 몸이 이상적이고 예쁜 여성으로 여겨진다. 체중을 잴 때 가급적 몸무게가 많이 나오도록 옷을 겹겹으로 껴입고 재기도 하며 결혼을 앞둔 여성들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는 일을 만들지 않아 살이 찌도록 한다(더 자세한 내용은 <FAT: 비만과 집착의 인류학>이라는 책을 참고). 다른 예로는 브라질을 언급할 수 있다. 브라질의 여성들은 수영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영을 하면 상체가 발달하는데 이런 신체적 유형을 좋아하는 것은 북미나 북유럽 일부 국가들이다. 이와 달리 엉덩이가 좀 크고 살이 약간 쪄 통통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는 것이 브라질의 이상적인 여성상이다. 따라서 브라질 여성들은 수영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고 수영으로 다져진 미국식 몸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문화적 차이의 사례들은 수도 없이 많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사례들을 수도 없이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다양성과 상대성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모두 각자의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또한 어느 한쪽의 문화적 가치가 다른 것에 비해 우월하다는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로부터 벗어나 각각의 문화가 나름의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 즉 문화상대주의의 입장을 삶에 대한 이해의 기본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낯선 곳에 갔을 때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인정하려 하기보다는 나의 기준에 맞추어 그들을 재단하려 했던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문화상대주의의 입장에 서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무척 쉽지 않은 질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기는 하지만 막상 자신의 문화적 특징이 무엇인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누군가 물어온다면 대답하기 전에 한참을 머뭇거려야 하고 대답을 한다 해도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모두 만족할만한 대답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 친구가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나에게 '한국 문화의 특징은 뭐가 있어?'라고 묻는다면 그 순간에 대답할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 무척 당황하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 세계에 부여하는 질서의 체계를 문화라고 한다면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어떤 개념과 의미들로 질서잡힌 체계를 만드는가?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문화적 특징을 '빨리빨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혹은 이 한국의 문화적 특징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가족주의, 유교적 관념, 가부장적 태도, 빠른 경제성장을 통해 보여준 단결력 같은 것을 특징으로 드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한국전쟁에 이은 분단이나 일제에 의한 강압적 통치, 민주화 운동의 경력 등 역사적 혹은 정치적 경험 등을 한국 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2002년에 보여주었던 흥과 열정 역시 간혹 등장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어떤 개념도 만족스럽지 않다. 분명 이 개념들 모두 한국인들의 삶 속에 영향을 준 요소들인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한국인들의 일상과 삶을 말끔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의 일상과 생활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요소들인 한국어, 흰쌀밥, 김치, 비빔밥, 불고기, 불닭볶음면, (지금은 거의 입지 않지만 예전에는 거의 유일한 옷이었던) 한복과 같은 물질문화의 요소들은 어떤가? 한국인들이라면 이 요소들이 지금의 우리들, 혹은 우리들의 앞선 세대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요소들이 한국인의 삶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흰쌀밥을 한국인만 먹는 것도 아니고 비빔밥, 불고기, 불닭볶음면도 지구화 시대를 맞이하여 '독자적인 문화적 요소'라고 할 수 없다. 고유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입는 사람을 힘겹게 찾아야만 하는 한복을 한국 사람들의 공유된 문화적 요소라고 하기에도 쉽지 않다.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차이를 인정하며 그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화상대주의를 견지하자는 말은 출발부터 장벽에 부딪혔다. 나 자신의 문화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데 타인의 문화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이것이 바로 문화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문화는 공기와 같아서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문화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특정한 사회에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태어나 그 사회의 문화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배우며 살아가는 것. 살아갈 수는 있지만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이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Elen Langer는 문화에 대해 "아무런 의식적인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흘러가는 심리적인 상태"라 했다고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화를 살아가는 방식은 mindlessness(무심함)의 상태인 것이다. 문화는 머리로 알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때문에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문화의 특성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일을 아예 방기할 수는 없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류학자들이 포함된다. 인류학자들이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은, 다양한 문헌들의 수집과 분석도 포함하지만 연구하고자 하는 사회의 사람들과 함께 일정 기간 살아가는 참여관찰(participant observation)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모든 사회는 각각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내부에도 더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가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는 만큼 여러 모습들이 혼재되어 있다. 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떤 측면은 공유하지만 어떤 다른 측면은 공유하지 않기도 한다. 문화를 비유적으로 시각화해본다면 한 사회의 문화는 표면이 매끄럽고 경계가 명확한 플라스틱 상자가 여러 개 차곡차곡 쌓여 있는 모습이 아니라 여러 겹이 층층으로 겹쳐있고 부분부분 그 두께도 다른 양배추나 패스츄리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민족이나 나라에 동질적인 문화가 있다고 쉽게 생각하고 그것을 극단적으로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한다. 이런 입장은 변화나 내적 다양성, 갈등이나 억압, 착취 등은 잘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지배적인 가치와 관련이 없거나 모순되는 행위 및 제도들은 무시되거나 억압되고 '순수'하거나 일관된 문화의 모습만 그리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앞서 예로 들었던 것처럼 한국의 문화를 ''의 문화 혹은 ''의 문화로만 보는 것,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철저한 국가주의에 입각해 살아간다고 믿는 것 등이 예가 될 것이다.
인간(人間)은 말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문화는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관찰, , 행위의 모방 등을 통해 학습한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고 그 사회에서 공유하는 방식의 의미화에 공감해야 한다. 이 사회가 돌아가는 이유는 서로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 특정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것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의미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믿음이 있어야 그 사회에서 모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저 상황에서는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이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저것에 대해서는 저렇게 해석하면서 그 사회의 사람들 대다수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누군가 특정 상황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점이 어느 정도 예측가능하다면 그와 나는 특정 문화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예측 가능성은 사회가 유지되는 일종의 믿음을 만들어낸다. 특정 사회에서의 문화라는 것은 그 믿음을 형성하는 일부이다. (어떤 믿음은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문화에 대한 논의는 어쩌면 믿음에 관한 논의일 수 있다. 사람들이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문화는 차이에 대한 이야기이자 특정한 사회의 맥락과 문화적 가치의 공유에 대한 이야기이며 소속감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도 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결국 살아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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