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람회장 사이의 황푸강 동서를 잇는 무료여객선 |
1999년 12월 8일 중국 정부가 2010년 엑스포 개최 신청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3년이 지나 상하이가 2010년 엑스포 개최지로 결정된 2002년 12월 3일, 상하이뿐 아니라 중국 전역이 들썩였다. 실제로 정부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 때보다 더 많은 공을 들였다는 이야기가 그리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푸둥, 난징루(南京路), 세기광장(世纪广场) 등 상하이 시내뿐 아니라 동네마다 민속악기를 동원한 축하 잔치가 밤새 이어졌고 선정 결과 발표 후 사나흘이 지나도록 상하이의 방송들은 관련 뉴스와 소식, 축하공연만으로 프로그램들을 채우고 있었다. 상하이 시 당위원회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报)>는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호외를 발행하여 상하이가 엑스포 개최지로 선정되었음을 알렸다. 복단대학(復旦大学), 교통대학(交通大学), 동화대학(东华大学), 상해대학(上海大学) 등을 포함하여 상하이의 각급 학교들은 강당이나 운동장에서 다양한 축하행사를 열었고 학생들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거나 “자원봉사자로라도 참가하여 자신과 상하이와 중국의 능력을 보여주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상기된 표정과 쉰 목소리로 전달하였다.
상하이 엑스포 개최 성공 소식을 방송으로 보면서 내가 눈여겨 본 것은 축하 행사장 곳곳에 걸린 플래카드들이었다. 개최지 선정을 축하하는 슬로건들 중 눈에 띈 하나는 “우리가 (베이징 올림픽 개최 성공에 이어) 또 다시 승리했다(我们又赢了)”라는 문구였다. 상하이 사람들에게 엑스포 유치는 성공을 넘어 ‘승리’를 자축할만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적으로 삼아 그를 쓰러뜨리고 쟁취하는 것이 승리라면 엑스포 개최 성공은 200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상하이가 지구화의 전쟁터에서 얻어낸 전리품이었다.
지하철 손잡이의 엑스포 광고 |
엑스포 유치가 확정된 후 상하이는 다시 변신하기 시작했다. 엑스포를 준비하면서 상하이가 보여준 변신 과정은 그 속도와 규모에 있어 가히 압도적이었다. 2년 정도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상하이를 떠나오던 2004년만 해도 3개 노선에 불과하던 지하철이 엑스포 개막에 맞추어 10개 노선으로 늘어났다. 여러 층으로 켜켜이 쌓인 순환도로와 고가도로에도 불구하고, 급증한 개인 차량들 덕에 출퇴근 시간이 아니더라도 상하이의 교통체증은 더 이상의 해결책은 찾을 수 없을 만큼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지하철이었고 10개의 노선이 상하이의 지하세계를 거미줄과 같은 모양으로 변화시켰다. 그런데 엑스포 개막일 이전까지 6-7개의 노선이 동시에 공사를 진행하느라 상하이 전역은 몸살을 앓았다. 막혀버린 도로 때문에 난 짜증은 시도때도 없이 울려대는 경적을 통해 청각적으로 전화(轉化)하였다. 가뜩이나 여름이 더운 상하이에서 차량과 건물의 열기, 그 열기를 누그러뜨리려는 에어컨의 또 다른 열기는 땀과 범벅이 되어 사람들의 코와 입을 턱턱 막았다. 2009년 만난 한 택시기사는 “사람들을 이렇게 불편하고 짜증나게 하면서까지 엑스포를 준비하는 것은 정부가 잘 못 하고 있는 것이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데 불가능해 보이던 지하철 공사, 푸둥과 푸시를 잇는 몇 개의 다리 건설, 도로 정비, 박람회장 공사는 2010년 5월 이전에 마치 마술의 힘을 빌린 것처럼 모두 끝나버렸다. 아주 오래 전부터 원래 그 모습으로 있어왔던 것처럼, 뚝딱거리는 기계음과 굴착기 소리가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엑스포가 개최되었다.
사람들은 보안과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정부의 설명에 큰 이견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모든 지하철역의 모든 통로에서 가방을 엑스레이 검사기에 통과시켰다. 엑스포의 중국관에 입장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 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몇 개 되지 않는 입구에 길게 줄을 서 입장을 기다리고 음식물, 긴 우산, 라이터 등은 반입이 되지 않는다는 말에 수긍하며 금속탐지기를 지나 ‘도시가 생활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城市, 让生活更美好; Better City, Better Life)’는 바로 그곳으로 들어가 현대 산업기술과 미디어의 발달을 시각적으로 경험하며 조금 전까지의 고생은 모두 망각의 강으로 던져 버렸다. 1918년 쑨중산(孙中山)이 [건국방략(建国方略)]에서 “동방의 대(大) 항구”를 만들기 위한 거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푸둥에 서서 세계 192개 나라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엑스포는 그 시간 상하이에서 경험하는 일상이 되었다.
관심 |
엑스포가 일상의 한 영역으로 들어오자마자 새로운 업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국관 입장을 위한 번호표를 받기 위해 이른 새벽에 대신 줄 서주는 직업이 생겼으며 박람회장 곳곳에서 자신들이 구한 중국관 입장용 번호표를 적절한 가격에 판매하는 암표상들이 생겨났다. 한 전시관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1-2시간, 유명 전시관에서는 최장 7시간까지 줄을 서야 하는 상황에서 10위안짜리 휴대용 의자는 박람회장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를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직업의 귀천이나 합법성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휴대용 의자 |
1851년 런던에서 처음 열렸던 만국박람회가 그랬던 것처럼 2010년의 상하이 엑스포 역시 시각적 경험으로 구성되었다. 150년 이전 박람회를 통해 사람들은 근대를 경험하고 상품의 세계를 만났다면 그로부터 150년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상하이 사람들은 디지털 미디어의 화려한 세계를 목격하였다.
사실 신기한 볼거리라는 것이 상하이 사람들에게 그리 새로운 경험은 아니다. 남경조약 이후 상하이는 서구의 문물과 생활방식이 유입되는 중요한 통로였고 1930년대 이전까지 ‘동양의 파리’라 불릴 정도의 면모를 갖추고 있던 곳이라 엑스포의 개최를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라 하기는 어렵다. 엑스포가 보여준 것은 오히려 시각적 스펙터클을 동원한 상징적 통합의 시도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행사장에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이미지들로 채워진 볼거리들을 장치하고 그 볼거리를 보러 온 사람들이 상하이의 뜨거운 햇볕아래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하게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것이 또 다시 볼거리가 되면서 엑스포의 상징적 가치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이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게 되었으니 이 정도의 고생은 참아낼 만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 그리고 여기에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알리는, 매일 다른 장면을 사용하지만 전달하는 내용은 반복되는 화면들. 이는 매일 밤 뉴스를 통해, 언론을 통해 재생산된다. 매일 새벽부터 와서 열 번 혹은 스무 번 이상 관람한 관람객을 찾아내 전하는 흥분된 인터뷰, 기대에 찬 상기된 표정으로 줄을 서있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엑스포가 만들어낸 보다 중요한 볼거리였다.
“우리가 또 승리했다”는 구호에서 볼 수 있던 것처럼 엑스포가 강조한 것은 ‘우리 중국’이었다. 과도한 빈부격차와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는 동요를 저지하고 ‘우리 중국’이라는 경계 안에서 그 개인들을 통합시키는 것이 엑스포의 열망이었다. 이 열망은 엑스포 개최에 맞춰 전세계에 퍼져 있는 화교들을 대상으로 엑스포 관람 캠페인을 실시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화교 여러분, 고향에 와 엑스포를 관람하세요"(华侨华人回家看世博)라는 제목의 프로모션이 그것이다. 자본을 가지고 있고 외부 세계에 대한 경험까지 있는 화교들에게 자신감을 계속 불어 넣어주고 그들이 '우리 중국'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 이를 통해 계속 성장하고 있는 중국이 더 큰 탄력을 받고자 하는 욕망을 이 프로모션에서 읽어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엑스포 내 상하이관의 타일그림의 벽. 일정 시간마다 그림이 바뀐다. |
또한 도시의 이벤트가 국가 전체의 이벤트가 되고 연해지역과 동부의 일부 도시들이 중국 전체를 견인하는 현 중국의 특징 역시 엑스포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论)’을 실천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 실천의 결과가 모든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도시가 생활을 더욱 아름답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생활이 그 도시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일상에 엑스포는 그렇게 들어왔고 그렇게 사라졌다. 상하이 사람들은 마치 의례를 통과한 것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관광 특수를 맞아 올랐던 각종 요금과 물가는 그러나 제자리를 찾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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