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일 일요일

연필깎기의 정석

연필을 아주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종이와 마찰하는 '스윽~스윽'하는 소리는 '다다다다 탁탁탁'하는 자판 두드리는 소리보다 훨씬 정감있다.

연필 역시 기본적으로 문구류에 포함되고 문구류를 좋아하는 내가 연필을 좋아하는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 여행을 가면 그곳의 연필을 사오는 취미가 생겼다.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더 많은 연필이 생길테니 그것으로 컬렉션을 만들까, 잠시 생각했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은 취미가 아닌 관계로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고 있다. (아래 사진은 곧 사용하기 시작할 최근 수집한 연필들. 국립중앙박물관, 상하이박물관, 타이완고궁박물원, 타이중의 국립타이완미술관, 그리고 사은품으로 받거나 문구점에서 구입한 연필들도 섞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재미도 있겠지만 현재 진행하는 수업과도 크게 관련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데이비드 리스 2013 연필깎기의 정석: 문필가,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 목수, 기술자, 공무원, 교사를 위한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 파주: 프로파간다.

연필깎기의 정석이라니!!!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순수하게 연필 깎는 법을 알려준다. 연필의 구성, 칼의 사용법, 외날 휴대용 연필깎이부터 벽걸이형 연필깎이의 장단점과 각각의 사용방법, 그리고 전동 연필깎이라는 바보 같은 물건을 멸종시키기 위한 전략까지 순수하게 연필 깎기에 관련된 이야기만 일관되게 하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연필을 깎기 위한 매뉴얼로 찾아 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매뉴얼로서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 세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휴대용 외날 연필깎이를 몇 번 회전하느냐에 따라 연필이 어떤 변화를 보이는가까지 표로 알려주고 있으니.

이 책은 유쾌하다. 이런 주제로 이렇게 책을 쓸 수 있구나 생각을 하게 하고, 그런데 이렇게 책을 쓰려면 충분한 관찰과 글쓰기의 노력이 필요하겠구나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책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꽤 즐거웠다. ㅋㅋㅋ

"연필을 깎고 고객에게 연필밥을 돌려주지 않는 사람을 믿지 말라. 연필밥은 엄연한 연필의 일부이며 궁극적으로 고객의 것이다." (16) (저자는 현재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연필과 책 주문을 받고 연필을 깎아 보내주고 있다. 연필은 35달러. 해외배송도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그의 홈페이지는 http://www.artisanalpencilsharpening.com/index.html)

"나는 연필 깎기 도구 가방 안에 항상 5.25에서 5.80 달러의 비상금을 넣어둔다. 현기증이 날 때 샌드위치를 사먹기엔 충분하지만 할 일을 내팽개치고 영화를 보러 가기에는 부족한 액수이므로 그 정도가 딱 적절하다." (23)

"나는 회전식 연필깎이의 칼날에 낀 흑연 가루와 나무 찌꺼기를 제거할 때 칫솔을 이용한다. ...  연필깎이 청소에 사용한 칫솔로 다시 이를 닦는 일은 없어야겠다." (25)

부록에는 세인트피터즈버그 '플로리다 안과'에서 주는 유익한 조언이 실려 있다. 병원 웹사이트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는데 다음과 같다: 막대기나 연필 같은 것에 눈을 찔렸을 때는 절대로 뽑지 마십시오. 그리고 안대를 느슨하게 붙이십시오. 이는 매우 심각한 응급상황이므로 즉시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225)

참 친절하기도 하네.

저자는 연필을 깎는 작업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고 몸을 쓰는 작업이므로 연필을 깎기 전에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고 시작할 것을 권고한다. 책을 따라가는 동안 연필을 다루는 이 섬세함에 감동하게 된다. 장인의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

이중날 회전식 연필깎이에서 나온 먼지 같이 고운 연필밥은 다람쥐 발을 연필밥 통에 담갔다 뺀 뒤 흑연 및 나무 부스러기가 떨어진 흔적을 따라가 다람쥐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니!! (118)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풍부한 아이디어..... 아.... 놀랍다!!

연필에 관심있는 분들은 책의 부록에 수록된 각종 연필 관련 사이트와 박물관 리스트도 참고하시라.


댓글 1개:

  1. 재밌는 책이네요ㅎㅎ 메뉴얼을 쓰는 메뉴얼에 도움이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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