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는 언제나 공장 노동자들의 착취를 이해하기에는 취약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여기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노동--정동적 노동뿐만 아니라 지식 생산과 상징적 생산--으로 간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영역에서, 소외는 정말이지 착취를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개념적 열쇠를 제공해준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2008 [다중], 서울: 세종서적. 148쪽)
요즘 한국사회에서 자주 쓰는 표현 중 "영혼없는 ~"이라는 말은 소외와 배제의 기호이다. 특히 청(소)년들의 노동현장에서 노동의 소외를 이보다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영혼 없는 웃음.
영혼 없는 반응.
영혼없는 '고객님 얼마나 불편하셨습니까.' 등
자신의 감정 서비스와 노동의 결과물로부터 완벽하게 소외된 현대사회의 알바생은 임성한 작가의 전매특허인 '유체이탈'을 매일 반복하고 경험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소외라는 용어가 여전히 유용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필시 한국의 노동현장과 청(소)년 알바 현장에 다녀갔던 것이 틀림없다.
'열정노동'이라는 이름으로, 기약없는 기대를 통한 자발적 피착취를 감당하는 영혼없는 알바생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노동의 결과로부터,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영혼으로부터까지 소외되어 카운터 뒤에 서 있는다.
이것이 현대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좀비의 형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좀비의 가장 큰 특징, 즉 영혼은 사라지고 육체만 남은 존재라는 점을 기억하자. 최근 개봉했던 <웜 바디스>는 그런 점에서 좀비의 새로운 변형이다.)
이들의 좀비 같은 형상에 불쾌해할 것이 아니라 누가 이들을 좀비로 내몰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이래저래 안녕하기 어려운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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