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0일 월요일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반은 농담이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이십대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안녕하지 못한 세상에서 누가 힘들고 고생스럽지 않겠냐마는, 수업과 과제 때문에 잠 못자고, 학자금 마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알바의 현장에서 마주친 진상 손님들에게 “잔돈 나오셨습니다”라는 말도 안되는 존대법을 쓰며 정신을 탈탈 털린 후, 결과적으로는 한 줄로 표기되는 스펙을 위해 자격증과 공모전 준비로 또 다시 밤 잠 못 이루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 비할만할까. 전에 쓴 글에서 영혼을 모두 빼앗겨버린, 좀비 형상의 알바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열정노동'이라는 이름으로, 기약없는 기대를 통한 자발적 피착취를 감당하는 영혼없는 알바생”을 만든 사회는 도대체 어떤 모습인지 질문해야 한다고 했던 말은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힘들게 살아가는 청춘들, 21세기 한국사회의 이십대들을 다룬 또 한 권의 책이 등장했다.


오찬호 2013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고양: 개마고원




사실 나도 궁금했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책들이 왜 그렇게 인기인지. ‘세상이 힘들기는 하지만 조금만 참고 견디면 행복이 올거야’라는 말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세상이 힘든데, 세상이 이상하게 나를 쪼아대고, 경쟁이라는 이름 뒤에서 신자유주의가 맑은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서서히/급속히 번져나가는데, 견뎌내고 참아내라니. 모든 사람에게 차력사가 되라는 것인가. 아니면 위기와 위험을 피하는 방식을 타조에게 배우라는 것이거나.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 역시 자기계발서의 공허함이다. (아래는, 책에 나온 내용들 중 몇 곳을 옮겨 놓은 것이다. 빌려 읽은 책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참고하기 위해 옮겨 온 것이 많아 길다. 이리도 긴 인용들을 모니터로 보는 것이 피곤한 분들은 책을 구해서 읽어보시라. 매우 빠르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아래에서 괄호 안 숫자는 쪽수. 약간 어색한 표현이나 비문으로 보이는 곳들은 한두 군데 수정함) 책을 옮겨온 것이 대부분인데, 이에 대한 주석 혹은 설명은 나중에 다른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것이 언제가 되든.


  • 각기 접근방식은 달라도 자기계발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건 '성과'라는 결과물이다. 즉, 자기계발은 실질적인 해결책을 동반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십대는 과연 이런 자기계발이 추구하는 바를 달성하고 있기에 거기 목매는 걸까? 그러나 아무리 봐도 지금의 자기계발 현상에는 '이렇게 하라!'는 주문만 있지 그로 인해 '달라진 결과'가 없다. 그렇게도 자기계발이 현상황을 극복할 유일한 진리라면, 그래서 한 개인이 '예스'라고 응답했다면 그로 인해 조직에 적응이 되든지, 자아가 구체적으로 치료되든지, 아니면 평생에 걸쳐 '즐길' 어떤 기술이라도 연마되든지 해야 할텐데, 지금 도대체 어떤 결과가 이십대들에게 있단 말인가. 오히려 지금의 청년들은 그런 결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걸 특성으로 갖고 있지 않은가. (32)
  • 자아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기통제의 '자기계발'은 이십대에게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잘 될 것이라는 작은 희망으로 버틴다. "고생 좀 하자! 그러면 좋은 일 있겠지?"라며 자기희생을 합리화한다. 그러다 지치면 "조금 쉬다가 다시 달리자!"라는 누군가의 위로에 눈물 흘리며 다시 원래의 그 '길'에 올라선다. (59)
  • 시중에 출간된 자기계발서들을 얼핏 넘겨만 보더라도, 이 책들이 자신의 고통은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임을 강요하고 있단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내 고통이 세상 누구나 겪는 성장통 정도로 간주되는 판에, 남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생길까? 이렇게 자신의 고통도 늘 스스로 참아야 하는 것으로 강요되는데, 남의 고통까지 왜 신경을 써줘야 한단 말인가? '이런 철학'을 개인이 가지게 되면 그는 특정한 시각을 갖게 된다. 힘들어 죽겠다며 하소연하는 사람들에게 "어쨌든 자기문제지, 그것도 못 받아들여?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아!"라고 반응하게 된다. "정말 힘들겠구나" 하는 공감대 형성은 당연히 어려워진다. (89-90)
  • '남들보다 성공하라!'는 자기계발의 시대에, 노력한 만큼의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해도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든 누르는 것은 가능하다. 다른 이보다 '위'에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이들은 서열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개인의 '신분 상승'이 실현되기 힘든 세상에서, 적어도 자기 노력의 결과가 평가절하되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남의 추락은 마다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남의 결점은 작더라도 부풀려 보게 된다. 견고한 서열이 균열을 보이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148-149)


그리고 대학입시만이 공부의 대표가 된, 입시위주의 교육도 크게 한 몫 한다. 수능은 자신이 투자한 만큼 돌려받는, 가장 ‘객관적 지표’라고 믿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 학생들을 대상으로 4년간 입시 경험에 대해서 조사해보니 무려 78%가 수능배치표와 자신의 관계를 '비합리적인 강요'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수능성적에 맞는 학교를 '강제로' 골라주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게 더 이상할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십대 대학생들의 일상은 이 수능배치표에 너무도 강고히 얽매여 있다.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로 암송되는 서울권 20개 대학의 배치표 순위가 이들의 삶을 지배한다. 그 배치표에서의 위치야말로 자신의 현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지표이다. 과거의 기억이 어떠했든, 현재 이들이 자기계발 시대를 살게 된 이상 그 기억은 이렇게 재구성된다. 수능배치표가 부여한 점수차는 타인과 자신을 구분, 구별, 차별해 주는 객관적인 숫자가 된다. 그것은 '별 것 아닌 숫자'가 아니라, 한 인간이 '시간을 얼마나 성실하게 사용했는가'를 증명하는 지표이다. 자신의 경쟁력을 드러내고 강조하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숫자인 것이다.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되는 상황이다. 노력과 시간관리 등을 강조하는 '자기계발 논리'는 이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에서 수능점수의 '가치'를 당당히 증명해 준다. (144-145)
본문에 인용된 한 학생의 에세이는 수능이 어떤 성격인지 잘 보여준다.


  • 나는 경제학과를 2005년에 입학했다. 당시 나는 연세대 인문대와 서강대 경제학과를 지원했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나의 선택이었다.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점수에 맞추어 전혀 다른 성격의 두 개의 학과(경제학과 인문학)을 지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이렇게 선택하게끔 했을까? 대학을 6년째 다니면서 이러한 고민은 처음 해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나처럼 점수에 맞추어 대학을 지원했을 것이다. 대학배치표는 수험생들을 위해 일종의 사회적인 합의에 따라 대학교와 학과들의 순위를 책정해 준 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학서열화는 참으로 편리하고 유용한 정보이지만 학과가 평생의 직업과 더 나아가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변수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참으로는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위험을 무릅쓰고 점수에 맞추어 서강대 경제학과를 지원했다. 왜냐하면 수능점수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수능 점수는 475점 어치의 '상품권'과 같았다. 상품권은 그 범위 안에서 물건을 살 수 있지만 거스름돈은 주지 않는다. 우리가 10만원 권 상품권을 가지고 쇼핑을 할 때, 어떻게든 10만 원을 다 쓰려고 노력하듯, 나 역시 나의 475점을 어떻게든 남김없이 다 쓰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수능점수가 재수까지 해서 힘들게 획득한 상품권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내가 살 수 있는 최대의 가격표가 붙어 있는 서강대 경제학과와 연세대 인문학과에 사용했다. 손해 보기 싫은 그 심리, 남들이 7만 원짜리 상품권으로 살 물건과 내가 10만 원짜리 상품권으로 살 물건이 같으면 손해라는 그 심리가 나를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다.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던 물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 나는 400점짜리 상품권으로 살 수 있는 다른 대학의 '영화학과'를 무척이나 가고 싶었다. (142-143)


그리고 수능은 단순히 성적에 따른 위계만 만들지 않는다.


  • 한국 대학들의 서열은 단지 수능점수만으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 경제적 지표로도 나뉘어진다. 각 대학에서 공시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학자금 대출현황을 확인해 보면 서울지역 주요 23개 대학의 학자금대출자 평균비율이 재학생 대비 14.5%인데, 서울대와 연세대는 불과 5%대다. 하위 6개 대학은 상위 4개 대학보다 학자금대출자 비율이 11%가 더 높았다. (199)


저자는, 현재의 상황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지는 말아야 하며 개인들의 힘이 모여 작은 변화라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그것이 희망이지 않겠냐고 이야기한다.


  • 우리의 이십대들은 여전히 '긍정'과 '희망'만을 강조하는 세상 한 가운데를 살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300만 권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200만 권이 넘게 팔렸다. 대학가에서는 유명 멘토들의 초청 특강을 알리는 현수막을 곳곳에서 보게 되는데, 그 내용들은 한마디로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이다. 이십대 청춘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라고 코너에 몰아놓고는 힘든 상황을 이겨낸 특별한 경우를 강조하는 건 이 사회가 실제로 공정하지 않은데도 이를 문제 삼지 말라는 격에 다름 아니다. 물론 긍정과 희망의 강조 이면에는 거꾸로 깊은 좌절에서 오는 패배의식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세상이 뭐 바뀌겠어? 세상이 원래 다 그런 거지, 사회는 어쩔 수 없는 거라니까! 바뀌는 게 없는데 환경 탓이나 하고 있다간 나만 손해잖아! 그 사이 남들이 나를 앞지른다고!' 맞다.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세상에 맞춰 나를 바꾸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이득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인류는 세상을 바꾸면서 진보해왔다는 점을. (190-191) … 인류가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어린이를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장애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인종차별을 부당하게 여겨 철폐하고... 이런 변화는 기존의 사회가 문제 많다는 걸 직시한 개인들의 노력에서 시작된 일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다만 그것이 왜 문제인지, 또 문제라면 이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모를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원래의 것이 옳은 듯 착각할 뿐이다. 그러나 착각이 깨지면 그 사회는 절로 좋은 쪽으로 구성원들을 이동시킨다. 사회는 그렇게 '개인들'로 인해 변하는 것이다. (192-193)
  • 비록 평범한 목표를 가지고 살더라도 인간다움이 지켜지는 그런 사회를 우리는 꿈꾼다. "닥치고 성공!"이라는 논리에 근거하여 세상만사를 판단하는 오류만이라도 줄이려 노력한다면, 굳이 '탈출'을 권할 필요도 없는 건강한 사회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겠는가. 그렇게 '힐링'이라는 단어가 굳이 필요없는 세상이 등장할 때, '아픈 청춘'의 수는 서서히 줄어들 것이다. 그러니 이십대를 향한 어쭙잖은 '감성팔이 위로'의 말은 당장 거둬들여야 한다. 진심으로 이십대를 사랑한다면 말이다. (234)

솔직히 말해 (그것에 대한 동의여부와 상관없이) 어쩌다보니 사회에서 소위 기득권층이라 이야기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미안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이 책이 이야기하는 주인공들과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그들이 처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현실을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도 여전히 미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라"라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만드는 데 함께 하자"라고는 이야기하고 싶다(그 일에 나도 좀 끼워달라는 말이다). 희망은 누군가 선심쓰듯 던져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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